딸이 엄마에게 속마음을 나누고 싶다고 한다. 엄마는 바쁘다. 대신 금액을 비워둔 수표를 건넨다. 〈더 바이올런트 이어스〉에서 파울라가 받고 싶었던 것과 엄마가 줄 수 있는 것은 …
딸이 엄마에게 속마음을 나누고 싶다고 한다. 엄마는 바쁘다. 대신 금액을 비워둔 수표를 건넨다. 〈더 바이올런트 이어스〉에서 파울라가 받고 싶었던 것과 엄마가 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엇갈린다. 돈을 아끼지 않는 부모라면 잘해주고 있다고 믿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파울라는 단지 외로운 딸로 머물지 않는다. 집 밖에서는 여학생 갱단을 이끌며 범행을 계획한다. 부모가 자신을 잘 모른다는 사실은 그에게 상처이면서 유리한 조건이다. 이 두 모습을 함께 보아야 영화가 내리는 훈계에도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
1956년에 나온 이 영화는 에드 우드의 각본으로 알려져 있지만 연출자는 윌리엄 모건이다. 우드의 기묘한 영화들을 떠올리며 들어가더라도, 먼저 들리는 말은 꽤 단호하다. 청소년의 폭력을 경고하고 그 책임을 부모에게 묻는다.
도입부의 칠판에는 자제와 예의, 충성과 바람직한 시민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들이 적혀 있다. 그 앞에 서는 소녀들의 모습 위로 경고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아이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보여주면서, 곧 그것을 어기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이다.
법정에서는 판사가 파울라의 부모를 꾸짖는다. 어머니는 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그 생각 뒤로 과거의 일을 펼친다. 관객은 아직 딸의 행적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부모가 실패했다는 판정을 듣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면서, 이미 내려진 판단의 근거를 보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장 무어헤드가 연기하는 파울라는 어른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할 줄 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도 그렇다. 학생회장 선거에 나선다는 명분으로 청소년 범죄에 관해 묻자, 아버지는 경찰이 심야 주유소에 경관을 배치할 계획까지 알려준다.
딸을 도와줬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말이 범행을 피할 정보가 된다. 파울라는 다음 주유소 강도 계획을 취소한다. 아버지가 일하는 신문사는 범죄를 취재하고 있지만, 아버지 자신은 바로 앞에 앉은 딸의 목적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는 부모의 무관심만큼 파울라의 판단력도 눈에 들어온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위험해진 계획을 바꿀 수도 있다. 엄마와 대화하지 못한 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이 능숙함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 상처받은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기로 결정한 몫이 남아 있다.
파울라의 곁에는 부모만 있는 것이 아니다. 훔친 물건을 사주는 장물아비 실라는 돈을 주고 학교를 파괴하는 일까지 맡긴다. 집에서는 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른이 있고, 바깥에서는 소녀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이용하는 어른이 있다.

범행이 커지는 과정을 모두 부모의 잘못으로 설명하면 실라와의 거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훔친 물건을 돈으로 바꾸어주고 다음 일거리를 제안한다. 파울라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돈을 더 받으려 흥정한다. 이들은 보호를 기다리는 아이이면서 범죄의 거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입으로 강조하는 원인과 실제로 보여주는 과정은 그래서 조금 다르다. 부모가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설명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돈을 벌고 상대를 속이고 새로운 일을 받아들이는 선택들이 이어진다. 법정의 긴 훈계보다 그 거래 하나를 보는 편이 인물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할 때가 있다.
영화는 범죄를 나쁜 일이라고 말하면서 범죄 현장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주유소를 털고, 차 안의 연인을 위협하고, 학교를 파괴하는 소녀들의 행동이 차례로 이야기를 움직인다. 어른의 충고를 듣는 시간보다 다음에 무슨 일을 벌일지 기다리는 시간이 생긴다.

소녀들이 공격한 연인의 모습은 이 범행을 부모 몰래 벌이는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피해자는 파울라의 집안 사정을 알 필요도 없이 폭력을 겪는다. 부모에게 잘못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해서 피해자의 처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범행의 자극에 끌려가던 시선을 잠시 멈추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교훈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판사의 말은 이야기를 다시 도덕적인 판단으로 이끈다. 이때 듣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경험이 남는다. 범행의 다음 전개를 기다리며 본 경험, 그리고 그런 행동이 왜 잘못됐는지 설명을 듣는 경험이다. 두 가지가 매끈하게 합쳐지지 않는 점이 이 영화의 묘한 뒷맛이다.
누가 잘못했는지 확신하는 목소리와, 그 목소리가 다 설명하지 못한 행동들이 한 영화 안에 남아 있다.
〈더 바이올런트 이어스〉에는 부모의 부재를 보여주는 간단한 장면과 그 부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행동이 함께 있다. 백지수표를 주는 엄마를 보면 파울라의 외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경찰 정보를 얻어내는 딸을 보면 그를 순진한 피해자로만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 차이를 남겨두고 보면 노골적인 교훈도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 된다. 판사의 말에 동의하는지부터 결정할 필요는 없다. 그가 내린 설명으로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고 어떤 인물은 빠져나가는지 생각해보면 좋다. 단정적인 말이 많은 영화가 오히려 질문할 자리를 남긴다.
◆ 엄마가 내주는 것
파울라가 청한 것과 엄마가 실제로 건네는 것을 나눠 보자. 돈을 준다는 행위만 보면 인색한 부모는 아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묻지 않고도 충분히 해줬다고 믿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짧은 장면을 씁쓸하게 만든다.
◆ 아버지 앞에서의 파울라
딸이 왜 범죄 정보를 묻는지 아버지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같은 대화를 듣는 관객은 파울라의 다른 생활을 알고 있다. 집안에서 통하는 좋은 딸의 모습이 바깥의 범행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볼 수 있다.
◆ 실라와의 거래
돈을 주는 어른과 일을 맡는 소녀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들어보자.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에서 보이지 않던 이해관계가 드러난다. 훈계하는 어른뿐 아니라 이들의 행동으로 이익을 얻는 어른도 영화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만하다.
◆ 말하는 사람과 움직이는 사람
경고의 내레이션과 법정의 말을, 파울라 일행이 행동하는 장면과 함께 생각해보자. 앞에서는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지만 범행에는 소녀들의 계획과 판단도 들어 있다. 영화가 한마디로 정리하려는 일이 실제 장면에서는 얼마나 복잡한지 살펴볼 수 있다.
◆ 제일 베이트 (1954) — 에드 우드 감독. 존경받는 의사의 아들이 범죄자와 어울리며 강도 사건에 휘말린다. 우드는 알렉스 고든과 함께 원안과 각본을 썼다. 가족이 아는 모습과 바깥에서 하는 일의 차이를 또 다른 범죄극에서 비교해볼 만하다.
◆ 늪의 여자들 (1956) — 로저 코먼 감독. 여경이 죄수로 위장해 여성 갱단의 탈옥을 돕고 숨겨진 다이아몬드를 찾으려 한다. 같은 무리에 속한 사람들의 목표가 서로 다르다. 한 집단으로 불리는 여성들 사이에서 누가 무엇을 숨기는지 따라가는 범죄 모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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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