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앤드 더 홀〉의 소년 존(찰리 쇼트웰)은 집 근처의 미완성 벙커에 가족을 가둔다. 가족들이 깊은 구덩이 안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는 동안, 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집 안팎을…
〈존 앤드 더 홀〉의 소년 존(찰리 쇼트웰)은 집 근처의 미완성 벙커에 가족을 가둔다. 가족들이 깊은 구덩이 안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는 동안, 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집 안팎을 오간다. 이제 넓은 집에서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사람은 없다. 아이가 원하던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된다.
사건은 끔찍한데 존의 행동은 기묘하게 일상적이다. 영화는 범행에 걸맞은 큰 감정이나 명쾌한 동기를 곧바로 내놓지 않는다. 가족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나면, 존이 다른 사람을 만나 평범하게 대화하는 시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이 소년이 다음에 무엇을 할까 하는 궁금증과, 방금 한 일의 무게를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하는 불안이 함께 생긴다.

어머니 애나(제니퍼 엘)는 구덩이 안에서도 아들이 괜찮은지 걱정한다. 자신을 여기에 가둔 아이에게 보이는 반응이라 뜻밖일 수 있다. 그러나 애나가 올려다보는 얼굴은 여전히 자신이 키워온 아들의 얼굴이다. 관객에게는 무서운 행동을 한 낯선 아이여도, 가족에게는 그 이전의 오랜 관계가 남아 있다.
연출을 맡은 파스쿠알 시스토는 배우들과 바로 이 점을 나눴다고 설명했다. 가족들은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범인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말을 나누던 존을 보고 있다. 이 관계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도 걱정과 당혹감이 나온다. 빨리 풀어달라는 요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반응들이 장면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아버지 브래드(마이클 C. 홀)와 누나 로리(타이사 파미가) 역시 좁은 공간에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은 화를 내고 서로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리를 높여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벽 안에서 울릴 뿐이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조건은 싸우는 방식까지 바꾼다. 영화는 납치의 공포만큼이나 같은 자리에 갇힌 가족들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위아래의 위치는 선명하다. 평소에는 부모가 아이의 생활을 정했지만, 지금은 존이 자유롭게 오가고 가족은 그를 기다린다. 그렇다고 존이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어른이 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활을 좌우할 힘을 얻는 일과 그 사람을 책임지는 일 사이의 차이가 이 구덩이에서 드러난다.

존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권위 있는 어른 앞에서는 위축되고, 친구와 있을 때는 또래 아이처럼 행동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어른처럼 보이게 하려는 태도도 나타난다. 찰리 쇼트웰의 연기가 흥미로운 것은 존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표정의 괴이한 아이로만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고 봐도, 어떤 순간에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감독은 어린 배우에게 인물의 철학을 길게 설명하는 대신, 상황마다 필요한 감정과 태도를 나누어 준비했다. 상대 앞에서 작아지는 때, 친구와 편해지는 때, 어른을 흉내 내는 때를 구별한 것이다. 이런 차이가 있으므로 존의 무표정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얼굴을 보고 있다고 해서 그의 생각까지 읽을 수는 없다.
영화가 존의 행동을 한 가지 원인으로 정리해주지 않는 것은 관객을 답답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알아내는 데만 몰두하면, 그 뒤에 이어지는 이상한 생활을 놓치게 된다. 존은 가족이 갇혀 있는 동안 집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부모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고 그들이 존을 곧바로 어른처럼 대하는 것은 아니다.
〈존 앤드 더 홀〉은 그런 행동을 따라가면서도 범행의 실행 과정을 세세한 볼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시스토는 이 영화를 현실에 발을 붙인 우화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평범한 집과 가족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만, 실제 범죄 기록처럼 모든 절차를 설명하려는 영화는 아니라는 뜻이다. 기이한 사건을 통해 아이가 상상하는 어른의 생활을 들여다본다.
이 영화의 화면은 가로로 긴 형태가 아니라 4:3 비율이다. 감독과 촬영감독은 인물의 얼굴을 중심으로 구도를 만들고, 배경의 깊이도 제한하고 싶어 했다. 좁은 벙커 안에서 벽을 넓게 보여주는 대신 그 안에 있는 사람을 가까이 보는 선택이다. 표정은 잘 보이는데 그 표정의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 시선이 오래 머문다.
소리도 공간을 연결한다. 구덩이 안의 장면은 세트에서 찍었지만, 바깥의 벌레 소리와 주변 소음을 더해 숲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만들었다. 눈앞은 벽으로 막혀 있는데 그 너머에서 소리가 들린다. 숲은 바로 곁에 있지만, 갇힌 가족은 그곳으로 나갈 수 없다. 조용한 영화라는 인상과 달리, 이 적막은 세심하게 만든 소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화면과 소리 덕분에 커다란 사건이 계속 터지지 않아도 긴장이 이어진다. 존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즉시 알아낼 수 없고, 가족들이 어떤 상태인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이의 얼굴과 갇힌 가족 사이를 오가면서 그 불안을 유지한다. 눈앞의 집과 숲은 평온해 보이는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평온하지 않다.
존은 자신을 간섭하는 가족만 없으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가 혼자 차지한 집은 부모가 마련하고 돌봐온 곳이다. 가족을 가둬놓고 누리는 편안함을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드러난다. 이 독립생활의 가장 섬뜩한 부분은 존이 혼자가 된 뒤에도 가족이 만들어준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 〈영주〉 (2018, 차성덕) — 부모를 잃고 동생과 살아가는 젊은 여성이 생계를 감당해야 한다. 어른 없이 사는 자유를 상상하는 존과 달리, 영주는 원하지 않았던 책임을 떠안는다. 두 작품의 상황을 함께 보면 혼자 생활한다는 말 안에 얼마나 다른 조건들이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 〈피어스〉 (2024, 넬리시아 로우) — 형의 과거를 둘러싼 의심과 형을 믿고 싶은 동생의 마음이 맞부딪힌다. 가족에게 위험한 면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의 모습을 쉽게 지울 수 없다. 존을 올려다보는 부모에게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또 다른 가족 관계에서 살펴볼 만하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