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거미여인의 키스〉의 몰리나(토나티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들려준다. 함께 갇힌 정치범 발렌틴(디에고 루나)은 처…
감방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거미여인의 키스〉의 몰리나(토나티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들려준다. 함께 갇힌 정치범 발렌틴(디에고 루나)은 처음부터 반가워하지 않는다. 1983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에 맞서다 붙잡힌 그에게 화려한 영화 속 연애는 한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몰리나는 그 영화의 장면들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감방에서 잠시라도 떠올리고 싶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몰리나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화면에는 스타 잉그리드 루나(제니퍼 로페즈)가 등장한다. 노래와 춤, 짙은 색채와 호화로운 의상이 감옥의 풍경을 밀어낸다. 이 영화의 묘미는 한 작품 안에서 전혀 다른 두 영화를 만나는 데 있다. 처음에는 뮤지컬이 감방 이야기의 휴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몰리나가 어떤 영화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알게 되면, 그가 발렌틴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싶은지도 궁금해진다.

빌 콘돈 감독이 새로 만든 〈거미여인의 키스〉는 1985년 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다시 찍은 작품이 아니다. 마누엘 푸익의 소설에서 출발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던 뮤지컬을 영화로 옮겼다. 감옥의 두 사람과 그 안에서 전해지는 영화 이야기라는 틀에, 배우의 몸과 노래로 감정을 드러내는 뮤지컬의 즐거움이 더해졌다.
제니퍼 로페즈가 연기하는 잉그리드 루나는 몰리나가 사랑하는 가상의 영화배우다. 로페즈는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 속 인물들도 맡는다. 한 번의 등장으로 시선을 붙잡아야 하는 스타의 역할이다. 이 영화는 로페즈의 유명세를 설명하는 대신, 무대 중앙에 선 그가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다. 몰리나가 왜 이 배우를 자꾸 떠올리는지 관객도 공연을 보며 알아갈 수 있다.
뮤지컬 장면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4:3 비율로 촬영했다. 가로로 긴 요즘 영화 화면보다 네모에 가까운 모양이다. 제작진은 배우의 얼굴뿐 아니라 춤추는 몸 전체가 잘 보이도록 구도를 짰다. 카메라를 움직일 때도 춤추는 배우가 다음 동작을 마칠 자리에 맞춰 도착하도록 조율했다. 춤을 잘게 잘라 박자를 만드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 한 동작이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과정, 여러 사람이 한 화면에서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몰리나와 발렌틴을 맡은 두 배우도 영화 속 영화에서는 다른 인물로 등장한다. 감방에서 보던 얼굴이 의상과 몸짓을 바꾸어 뮤지컬 안에 놓인다. 그래서 두 세계를 오가는 일이 점점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감옥의 인물과 별개의 구경거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상상 속에서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를 함께 보고 있었던 셈이다.

몰리나가 좋아하는 영화를 설명할수록 그의 마음도 조금씩 드러난다. 어떤 배우를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어떤 사랑을 동경하는지, 어떤 장면을 다시 보고 싶은지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바람이 담긴다. 발렌틴에게는 처음에 시시하게 들렸던 영화가 몰리나를 알아가는 단서가 된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영화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반대로 발렌틴의 정치적 신념도 몰리나가 함께 감당해야 할 현실이 된다. 감옥에서 나누는 대화는 취향이 다른 두 사람의 수다로 끝날 수 없다. 이들을 가둔 권력은 여전히 바깥에 있고, 누구를 믿을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대가가 따른다. 뮤지컬이 아름다울수록 그 세계로 언제든 떠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더 또렷해진다.
감독은 감옥 이야기와 뮤지컬을 번갈아 보여줄 때, 한쪽의 감정이 다른 쪽 때문에 끊기지 않도록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단지 화려한 장면을 일정한 간격으로 끼워 넣는 문제가 아니다.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를 기억한 채 노래를 듣게 하고, 노래가 끝난 뒤에는 감방의 인물이 조금 다르게 보이도록 두 흐름을 연결해야 한다. 영화 속 영화를 보는 관객과, 그 이야기를 듣는 발렌틴은 이 점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래서 감방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공연이 끝난 뒤의 대기 시간으로만 넘기기 어렵다. 노래하는 동안 마음껏 드러냈던 감정이 이제는 말 몇 마디와 상대를 대하는 태도 안에 담겨야 한다. 큰 무대와 좁은 방이 번갈아 등장할수록 두 배우의 작은 반응에도 관심이 간다. 뮤지컬의 화려함이 감방의 대화를 더 자세히 보게 만드는 것이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영화 한 편을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적인 일인지 새삼 느끼게 한다. 줄거리를 전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어떤 대목에 힘을 주고, 좋아하는 장면에서는 말이 길어진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영화와 함께 말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몰리나가 펼쳐 보이는 눈부신 뮤지컬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발렌틴과 함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된다.
◆ 〈리브 원 데이〉 (2025, 아멜리 보낭) — 고향에 돌아온 요리사의 관계와 감정이 익숙한 노래를 통해 드러난다. 대사만으로 말하기 어려운 마음을 노래가 어떻게 이어받는지 비교해볼 만하다. 거대한 무대가 아닌 일상의 장소에서도 뮤지컬이 인물의 속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캐롤〉 (2015, 토드 헤인즈) — 서로에게 끌리는 두 여자가 각자의 생활과 사회의 시선 속에서 관계를 만들어간다. 말을 아끼는 순간에도 시선과 몸짓이 감정을 전한다. 노래와 춤으로 마음을 크게 드러내는 장면들을 본 뒤 이어 보면,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의 또 다른 방식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