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김꽃비)은 백화점에서 비싼 가전제품을 주문하고, 부동산에서는 고급 오피스텔을 살 것처럼 둘러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가전제품 주문을 취소한다. 물건을 갖지는 못해도 그 물…
아영(김꽃비)은 백화점에서 비싼 가전제품을 주문하고, 부동산에서는 고급 오피스텔을 살 것처럼 둘러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가전제품 주문을 취소한다. 물건을 갖지는 못해도 그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시간은 누릴 수 있다. 김동명 감독의 〈거짓말〉에서 아영이 꾸미는 생활은 이렇게 하루 안에서도 벌어졌다가 접힌다. 무엇을 샀느냐보다, 무엇을 살 사람으로 보였느냐가 중요해지는 쇼핑이다.
실제 아영은 피부과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다. 동료들에게 자랑하는 부유한 남자친구도 그가 꾸며낸 이야기다. 아영에게 청혼하는 태호(전신환)는 가난한 남자다. 함께 살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려면, 남들에게 말해온 삶과 실제로 살 수 있는 삶 사이의 차이를 마주해야 한다. 아영의 거짓말은 허풍을 떠는 순간만 지나면 끝나는 말이 아니다.
아영이 매장에서 돈 있는 손님처럼 구는 태도에는 남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김동명은 물건을 살 때 형편보다 여유 있는 사람인 듯 행동해본 일상적 경험에서 인물을 구상했다. 큰돈을 가로채는 사기극을 만들기보다, 걷고 밥 먹고 일하는 생활 안에 거짓말이 퍼지는 모습을 담으려 했다. 아영을 가까이 보게 되는 입구도 거기에 있다. 그의 말은 터무니없어도,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지 신경 쓰는 마음까지 낯설지는 않다.
그렇다고 김꽃비가 가난한 아영의 딱한 처지를 먼저 내보이려 한 것은 아니다. 배우는 아영이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보았고, 그런 감정을 품고 연기하지 않았다. 아영이 거짓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불행을 인정받는 일이 아니라 원하는 모습을 믿게 하는 일이다. 관객이 그의 사정을 알고 안쓰러워하는 것과, 아영 자신이 동정을 구하는 것은 다르다.
김꽃비는 촬영을 마친 뒤 영화를 보면서야 아영이 더 딱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인물로서 욕망을 밀고 나갈 때와, 그 인물을 밖에서 바라볼 때 생기는 차이다. 그래서 이 연기의 흥미는 아영을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쉬워지는 데 있지 않다. 거짓말의 뻔뻔함을 덜지 않으면서도, 그가 왜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지 함께 생각하게 하는 데 있다.
태호는 아영을 바른길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 아영의 말에서 허점이 드러나 주변 사람들의 추궁을 받을수록, 그를 받아주는 태호가 둘 사이에서 더 믿을 만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신환은 태호를 이해해가면서 남에게 베푸는 자기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돕는 행동에는 상대를 위하는 마음뿐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도 들어갈 수 있다.
아영을 고쳐야 할 사람으로만 보면, 태호 자신이 이 관계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영은 부유한 연인과 결혼할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고, 태호에게는 자신이 연인을 좋은 쪽으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두 사람이 함께 꾸리려는 삶에는 상대의 모습뿐 아니라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도 끼어 있다.
두 배우가 서로를 상대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전신환은 김꽃비의 연기가 예측하기 어려워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받아주려 했다고 말했다. 아영이 거짓말을 펼치는 동안 태호가 그것을 어떻게 듣고 받아주는지도 연기의 몫이 된다. 한 사람의 허풍을 구경하는 영화에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의 태도까지 살피는 영화로 관심이 넓어진다.
상견례 자리에서는 태호도 거짓말을 한다. 아영만 잘못된 사람이고 태호는 그를 바로잡을 사람이라는 구분이 더는 편하지 않다. 전신환은 태호가 애초부터 거짓말을 하려고 그 자리에 간 것은 아니며, 상황을 넘기려다 그렇게 됐을 것이라고 보았다. 아영에게는 너무 쉽게 지적할 수 있던 허점이 태호에게도 생긴다. 〈거짓말〉은 한 여자의 허세를 따라가다가, 그 여자를 판단하던 사람도 자기를 포장하는 순간을 보게 한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