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남자가 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 MovieLAB LAB

우리 회사는 형편없는 영화를 만든다고 제작자가 말한다. 일을 구하러 온 각본가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대본도 쓸 줄 모르면 굶어 죽었을 거라고 받아친다. 트럼보에서 브라이언 크…

말 잘하는 남자가 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 MovieLAB LAB

우리 회사는 형편없는 영화를 만든다고 제작자가 말한다. 일을 구하러 온 각본가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대본도 쓸 줄 모르면 굶어 죽었을 거라고 받아친다. 트럼보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 연기하는 달턴 트럼보는 궁지에 몰려서도 말솜씨를 잃지 않는다. 제 처지가 우스운 줄 알고, 그 우스움을 먼저 이용한다. 구직자가 제작자를 웃길 수 있다면 거래를 시작할 여지도 생긴다.

하지만 이 유능한 말솜씨가 집에서도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딸이 생일 케이크를 먹자고 찾아왔을 때도 그는 쓰던 대본을 멈추지 못한다. 남을 웃기고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이 정작 가까운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듣지 않는다. 크랜스턴의 트럼보가 흥미로운 것은 그 차이 때문이다. 밖에서 그를 응원하다가, 집에서는 그가 입을 다물어주길 바라게 된다.

각본가는 일자리를 구할 때도 이야기를 만든다

《트럼보》 홍보용 키아트. 타자기 앞에 앉아 담배 홀더와 술잔을 든 브라이언 크랜스턴 뒤로 A HERO·A TRAITOR·BLACKLISTED 같은 붉은 수식어가 겹쳐 인쇄돼 있다.

제이 로치가 연출한 이 영화에서 트럼보는 정치적 신념 때문에 할리우드의 일자리를 잃는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에는 자기 이름을 내걸고 일할 수 없어 가명으로 대본을 쓴다. 존 굿맨이 맡은 제작자 프랭크 킹 앞에 앉을 때, 그의 글솜씨는 이미 알려져 있다. 필요한 것은 당장 돈을 받고 일할 통로다.

여기서 트럼보는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는지 자랑하지 않는다. 제작자가 원하는 수준과 속도에 맞춰 쓸 수 있다고 나선다. 예술적 자부심을 접어두는 말인데도 주눅은 들지 않는다. 상대가 낮춰 말한 자기 회사의 영화를, 각본가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일로 바꾸어 받아낸다. 글 쓰는 능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 대화부터 능숙하게 꾸리는 셈이다.

크랜스턴은 실제 트럼보의 인터뷰를 보며 목소리의 움직임을 살폈다고 말했다. 음이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독특한 말투가 있었다. 안경과 콧수염, 옷차림도 도움이 됐지만, 누구를 향해 어떤 말을 하느냐가 그 외양을 채운다. 대본으로 먹고사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그가 입 밖으로 꺼낸 말도 살핀 것이다.

배우는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는 것으로 인물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자료를 읽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자신이 이해한 트럼보를 만들어야 했다. 재치 있는 대답 하나에는 일거리를 놓칠 수 없는 사정도 들어 있다. 그 절박함이 사라지면 말 잘하는 유명인의 흉내만 남는다.

욕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딸

《트럼보》의 한 장면

트럼보의 아내 클레오는 다이앤 레인이, 딸 니키는 엘 패닝이 연기한다. 이들에게 아버지의 싸움은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는지, 말을 걸어도 되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돈을 벌기 위해 계속 일해야 한다는 사정과 가족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는 서운함이 같은 집 안에 있다.

니키의 생일에도 트럼보는 욕실에서 대본을 쓴다. 케이크를 먹으러 오라는 말에 그는 작업 중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화를 낸다. 니키가 자기 생일이라고 설명하려는데 그 말마저 끊긴다. 아버지에게는 일이 끊긴 순간이고 딸에게는 자기 이야기를 꺼낼 기회조차 사라진 순간이다. 누가 말을 잘하는지보다 누가 말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는 대화다.

딸의 요구는 아버지에게 신념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잠시 내려와 함께 생일을 보내자는 부탁이다. 그런데 대본을 완성하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그의 이유는, 가족의 작은 부탁마저 밀어낸다. 앞서 제작자에게 재치 있게 대꾸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더 야속하다. 이 사람에게 상대의 말을 받아칠 능력이 없어서 생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크랜스턴은 가족이 식탁에 모이는 장면 등을 준비할 때 배우들이 각자 맡은 인물의 입장을 말해보았다고 설명했다. 레인도 클레오의 자리에서 장면을 바라봤다. 감독은 각 배우의 의견을 듣고 연습에 반영했다. 주인공의 논리가 그럴듯할수록 곁에 있는 사람의 사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런 준비가 보여준다. 가족을 단지 영웅의 희생을 증명하는 사람들로 두지 않을 때 이 영화의 집 안이 살아난다.

같은 말을 매번 똑같이 할 수는 없다

크랜스턴은 시트콤 말콤네 좀 말려줘를 마친 뒤 비슷한 코미디 제안들을 받았지만, 했던 일을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 고사했다고 말했다. 이후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로 이어진 경력은 익숙한 역할로 돌아갈 수 있을 때 다른 쪽을 택한 결과이기도 하다. 트럼보 역시 그 유명한 배역의 분노를 다른 시대에 옮겨놓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남자에게는 글을 써야 하는 이유와 대화를 망치는 방식이 따로 있다.

그가 무대에서 연기한 네트워크의 방송인 하워드 빌도 말을 무기로 쓰는 인물이다. 크랜스턴은 같은 연설을 어떤 날은 분노하며, 어떤 날은 슬퍼하며 했다고 설명했다. 대사는 같아도 그 말을 할 때의 감정을 한 가지로 고정해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경험을 이야기한 배우가 맡은 트럼보도 재치라는 말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을 얻으려는 대화와 딸을 내쫓는 대화가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트럼보를 좋아하게 만드는 재치와 그에게 화가 나게 만드는 고집을 모두 남겨둘 때, 크랜스턴의 연기는 닮은 외모보다 오래 기억된다.

《트럼보》 홍보용 키아트. 할리우드 야경을 배경으로 흰 턱시도 차림의 브라이언 크랜스턴을 가운데 두고 두 여성 배우가 좌우에 서 있다. 오른쪽이 헬렌 미렌이다.

지금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유명한 배우가 실존 인물과 얼마나 닮았는지 보는 즐거움이 있다. 트럼보에서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사람의 말솜씨가 상대에 따라 어떤 결과를 낳는지 들을 수 있다. 일자리를 구하는 재치와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독선이 멀리 떨어진 성격은 아니라는 점이 이 초상의 매력이다. 응원하던 주인공에게 잠깐 정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크랜스턴은 연기 안에 남겨놓는다.

감상 포인트

프랭크 킹에게 건네는 대답
제작자가 자기 영화의 수준을 낮춰 말할 때 트럼보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내는가. 자존심을 드러내는 방법이 꼭 자기 실력을 높이 평가해달라는 요구일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상대가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농담 속에 들어 있다.

목소리가 오르내리는 자리
말의 높낮이와 함께 그 말을 듣는 사람도 보게 된다. 같은 능숙한 말투라도 거래를 제안할 때와 자기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할 때의 인상은 다르다. 크랜스턴이 준비한 목소리를 외형 재현에만 한정하지 않고 듣는 방법이다.

니키의 끝나지 못한 말
생일 케이크를 먹자는 부탁이 훈계로 되돌아오는 장면에서, 딸이 무엇을 설명하려 했는지가 남는다. 트럼보의 일과 신념을 이해해온 관객도 이 부탁만큼은 들어주었으면 하게 된다. 가족의 입장은 거창한 반론 없이도 분명하다.

클레오가 함께 있는 장면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뿐 아니라, 그와 생활하는 가족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살펴볼 만하다. 각본가의 투쟁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에는 대본을 쓰는 사람과 그 대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이 달라진다.

관련 작품

프로페서 앤 매드맨 (2019)
사전을 편찬하는 제임스 머리와 정신병원에 수용된 윌리엄 마이너가 글을 통해 연결된다. 일에 바친 집념만으로 사람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어볼 만하다. 트럼보의 재능과 고집을 함께 보았다면, 단어를 모으는 두 남자의 협력과 각자의 사정에도 관심이 간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2019)
제이 로치가 방송국의 권력자에 맞선 여성들을 다룬 영화다. 두 작품 모두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발언을 가로막는다. 트럼보의 집 안팎에서 누가 말할 기회를 얻는지 살폈다면, 이곳에서는 카메라 앞에 서는 여성들이 정작 일터에서 어떤 말을 하기 어려웠는지로 질문을 이어갈 수 있다.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