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취직하려고 경쟁자를 죽이겠다는 남자가 있다. 〈어쩔수가없다〉(2025)의 만수는 25년 동안 종이를 만들다 해고된 가장이다. 이병헌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자존심이 번갈아 비친…
다시 취직하려고 경쟁자를 죽이겠다는 남자가 있다. 〈어쩔수가없다〉(2025)의 만수는 25년 동안 종이를 만들다 해고된 가장이다. 이병헌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자존심이 번갈아 비친다. 오래 다닌 회사에서 밀려난 심정까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구직자들을 없애겠다는 계획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박찬욱은 그 둘 사이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박찬욱의 인물들은 자기 행동을 설명할 사연이 많다. 금지된 우정을 지키려는 병사, 누군가에게 복수하려는 사람, 용의자를 사랑하게 된 형사. 사연을 들으면 마음이 기울다가도 그 사람이 벌이는 일을 보면 다시 망설이게 된다. 감독의 경력을 따라가다 보면 잔혹한 사건만큼이나 이 망설임을 만드는 솜씨가 눈에 들어온다. 인물을 이해하는 일과 그 사람 편을 드는 일이 자꾸 어긋난다.
박찬욱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공동경비구역 JSA〉에는 병사들이 함께 웃는 시간이 있다. 그를 잔혹한 사건을 잘 만드는 감독으로 기억한다면 오히려 이 시간이 눈에 들어올 만하다. 사람에게 마음이 가야 그 사람이 갇힌 상황도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북 병사들은 여배우 사진을 애인 사진이라며 내밀고, 서로 아는 노래 이야기를 한다. 군복을 벗지 않았는데도 친구들이 좁은 방에 모여 노는 자리처럼 보인다. 박찬욱은 이 작품에서 비극보다 유머가 잘 전달될지를 걱정했다고 말했다. 남북이 서로 다르면서도 닮았다는 사실을 농담으로 전하고 싶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 총격 사건이 일어난 뒤의 조사에서 출발한다. 병사들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 만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웃음이 충분히 쌓일수록 누구를 적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명령이 더 이상해진다. 이병헌과 송강호의 친근한 표정은 분단을 설명하는 긴 연설보다 먼저 두 사람의 관계를 믿게 만든다.
그렇다고 우정이 생겼으니 문제가 풀렸다고 끝낼 수는 없다. 만남을 비밀로 해야 하는 조건은 그대로다. 개인의 마음을 충분히 보여준 다음, 그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남겨두는 것. 이후 영화에서 훨씬 가혹해지는 박찬욱의 질문은 이 병사들 곁에서도 시작된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누가 왜 자신을 15년 동안 가뒀는지 모른 채 풀려난다. 자신을 괴롭힌 상대를 찾아 나서는 힘과, 정작 사건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처지가 함께 간다. 최민식의 거친 움직임은 누가 그를 가뒀는지 알아내려는 조급함까지 전한다. 무엇을 해야 이 감금에서 정말 벗어날 수 있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오대수가 처음에 알고 싶은 것은 자기에게 그런 일을 한 사람의 이름이다. 관객도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 누가 가뒀는지 알아야 화를 낼 상대를 정할 수 있으니 그의 조급함이 이해된다. 그 질문에 몰두하는 동안, 우리가 이 사람에 관해 정작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뒤로 밀린다. 가까이 따라왔다고 해서 그를 충분히 아는 것은 아니다.
박찬욱은 정보를 한꺼번에 내주지 않는다. 먼저 들은 사정에 마음을 보탠 뒤에 다른 사정이 들어오면, 관객은 사건뿐 아니라 자기 판단도 고쳐야 한다. 인물의 분노가 이해된다는 것과 그가 하려는 일을 허락한다는 것은 별개다. 복수극의 불편한 재미는 그 둘을 너무 빨리 붙여버린 자기 마음을 발견하는 데도 있다.
〈헤어질 결심〉의 형사 해준은 상대에 관해 알아가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박해일의 해준은 예의 바르고 자기 일에 성실하다. 그런데 탕웨이의 서래를 만나면서 수사 때문에 기울이는 관심과 사랑 때문에 기울이는 관심을 나누기가 어려워진다. 남편의 죽음을 조사하는 형사와 의심을 받는 아내. 두 사람의 대화는 같은 말을 수사와 구애 양쪽으로 듣게 한다.
형사는 용의자의 말을 세심하게 듣고 생활을 살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관심을 기울인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을 하므로 해준은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부터가 사적인 마음인지 쉽게 가를 수 없다. 관객 역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면서, 그 가까움 때문에 수사가 달라질 가능성은 걱정하게 된다.
정중함은 그 갈등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해준이 무례한 사람이라면 의심하기 쉽다. 하지만 예의 바르게 묻고 진심으로 염려하는 사람에게는 우리도 더 관대해진다. 박찬욱은 그 호감을 이용한다. 인물의 매력 때문에 판단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도, 여전히 그 둘을 조금 더 보고 싶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인물이 놓인 방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아가씨〉(2016)의 서재에서는 책과 장식, 낭독을 듣는 사람들의 자리가 위압적인 질서를 만든다. 박찬욱은 사람이 작아 보일 만큼 큰 공간을 원했다. 다다미를 걷으면 일본식 실내 정원이 드러나는 구상은 류성희 미술감독이 더했다.
서재가 아름답다는 감상에서 잠깐 더 머물면, 그 아름다움을 누가 소유하고 누가 거기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지가 보인다. 김민희의 히데코와 김태리의 숙희는 같은 저택 안에서도 차지하는 자리가 다르다. 인물 사이의 권력은 대사로만 전달되지 않는다. 어느 방에 들어갈 수 있는지, 누구 앞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관계를 설명한다.
아름답게 보이는 방을 다시 살펴야 했듯, 설득력 있게 연기하는 사람의 말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는 다른 사람을 밀어낼 명분부터 찾는다. 만수와 경쟁하는 사람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구하는 처지다. 생계가 위태롭다는 공통점이 연대로 이어지는 대신, 서로를 제거해야 한다는 계산에 이용된다. 오래 일한 경력이 자랑이던 남자가 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을 위협으로 여긴다.
박찬욱은 이병헌의 연기에 관객이 너무 쉽게 설득되지 않도록 카메라의 거리와 편집 시점을 조절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을 가까이 본다는 것은 끝까지 그 편이 된다는 약속이 아니다. 얼굴을 보고 사정을 들은 뒤에도, 그 사람이 내세운 이유를 다시 생각할 시간이 남아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농담과 〈헤어질 결심〉의 정중한 대화를 함께 떠올리면 강렬한 사건 사이에서 지나쳤던 생활과 유머가 보인다. 이런 순간들이 인물을 좋아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선택을 판단하는 일도 어려워진다. 박찬욱의 영화를 다시 보는 재미는 이미 아는 사건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언제 누구에게 마음을 주었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한 편을 본 뒤 다음 작품에서 같은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병사들의 우정에는 마음을 보태다가도 복수의 계획 앞에서는 주저할 수 있다. 예쁜 방에 감탄하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강요받는 역할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처음 들었던 감정이 끝까지 맞는지 다시 살피는 과정에, 이 영화들을 여러 편 보는 보람이 있다.
◆ 사건 전에 쌓이는 농담 —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병사들이 어떤 소재로 웃고 서로를 놀리는지 보자. 남과 북이라는 소속 외에 취향과 성격이 드러나는 순간들이다. 웃음이 늘어날수록 이들이 만나는 일 자체가 금지돼 있다는 조건도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 주인공이 모르는 정보 — 〈올드보이〉에서 관객이 오대수보다 먼저 아는 사실과 함께 모르는 사실을 구별해보자. 정보가 주어지는 순서에 따라 누구를 응원하는지도 달라진다. 그 사람의 사정을 충분히 들었다는 느낌이 행동의 정당성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살필 수 있다.
◆ 아름다운 방의 주인 — 〈아가씨〉의 저택에서는 장식만큼 인물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와 그곳에서 해야 하는 일을 살펴보자. 같은 집에 산다는 사실이 같은 권한을 뜻하지 않는다.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대사로 설명되지 않은 신분과 권력의 차이까지 알려준다.
◆ 배우의 얼굴과 카메라의 거리 — 〈헤어질 결심〉과 〈어쩔수가없다〉에서 얼굴 가까이 머무는 화면 뒤에 어떤 장면이 이어지는지 보자. 한 사람의 감정에 몰입하다 주변 상황을 다시 보게 되는 때가 있다. 연기뿐 아니라 화면의 크기와 편집도 인물에게 느끼는 친밀함을 조절한다.
◆ 〈공동경비구역 JSA〉 — 병사들의 친밀한 만남과 그 만남을 조사하는 시선이 함께 있다. 처음에는 웃고 넘어간 행동이 조사 과정에서는 어떻게 달리 설명되는지 살피면, 사람의 사정과 공식적인 기록 사이의 간격을 볼 수 있다.
◆ 〈헤어질 결심〉 — 의심과 관심이 같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영화다. 형사와 용의자의 대화를 따라가며 누가 상대에 관해 무엇을 안다고 믿는지 살펴보자. 복수극에서 정보로 만들어지던 긴장이 연애의 감정에서도 작동한다.
──────────
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