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무대 위의 왕이었던 남자가 있다. 폴 롬바르드. 래트 팩 시절의 잔향을 몸에 지닌 크루너. 턱시도와 마티니가 어울리는 시대의 남자. 그런데 그 시대는 끝났다. 폴은 햄턴스의…
한때 무대 위의 왕이었던 남자가 있다. 폴 롬바르드. 래트 팩 시절의 잔향을 몸에 지닌 크루너. 턱시도와 마티니가 어울리는 시대의 남자. 그런데 그 시대는 끝났다. 폴은 햄턴스의 저택에서 과거의 영광을 마시며 산다. 딸 주드가 찾아온다. 뉴욕에서 싱어송라이터로 성공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그늘과 자신의 재능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여자다. 리브 어게인은 무대 위의 카리스마가 무대 아래에서는 무력해지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유산을 거부하면서도 그것 없이는 자신을 정의할 수 없는 딸의 이야기다.

크리스토퍼 워컨은 폴 롬바르드 역에 자신의 삶을 녹인다. 워컨 자신이 브로드웨이 무용수 출신이며, 뮤지컬 무대에서 경력을 시작한 배우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그의 근본적 언어이며, 영화 경력에서 이따금 그 언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헤어스프레이(2007)에서, 그리고 팻보이 슬림의 뮤직비디오 'Weapon of Choice'(2001)에서.
폴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워컨의 연기는 연기를 넘어선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노인이 마이크 앞에 설 때, 목소리는 예전 같지 않지만 프레이징은 여전히 날카롭다. 의지와 능력 사이의 간극을 워컨은 자신의 몸으로 체현한다. 70대의 워컨이 노래할 때, 관객은 허구의 폴 롬바르드가 아니라 실제의 크리스토퍼 워컨이 시간 앞에서 버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영화의 음악 크레딧에는 Joe McGinty의 이름이 올라 있다. 폴이 마이크 앞에서 부르는 곡도 주드가 뉴욕에서 붙들고 있는 곡도 결국 한 사람의 음악 설계 아래 놓인다는 뜻이다. 세대가 갈라진 두 사람의 노래가 작업 단위에서는 애초에 하나로 묶여 있었던 셈이다. 부녀의 화해가 대사보다 먼저 사운드트랙 쪽에서 준비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딸 주드 역의 앰버 허드는 워컨과 대비되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허드의 주드는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찾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 눌림이 허드의 절제된 연기에서 느껴진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올 때 주드의 자세가 미세하게 변하고, 목소리가 작아지며,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영화의 배경인 햄턴스는 뉴욕 부유층의 여름 별장 지대다. 그러나 폴의 햄턴스는 과거의 부와 명성이 서서히 바래가는 공간이다. 넓은 저택이지만 텅 비어 있고,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폴은 혼자 술을 마신다. 이 공간의 넓이가 폴의 고립을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넓을수록 더 외로운 역설.
로버트 에드워즈는 촬영을 맡은 Anne Etheridge와 함께 햄턴스의 풍경을 향수와 쇠락의 이중 톤으로 활용한다. 햇빛은 따뜻하지만, 그 따뜻함이 오히려 폴의 냉각된 삶과 대비된다. 바다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 이 대비가 영화의 기저에 깔린 멜랑콜리를 만들어낸다.
주드가 이 공간에 들어오면서 동선이 변한다. 혼자이던 폴의 루틴에 딸의 존재가 끼어들고, 두 사람의 동선이 겹치면서 충돌이 시작된다. 부엌, 거실, 테라스. 좁은 공간이 아님에도 두 사람은 계속 부딪힌다. 물리적 공간이 충분함에도 감정적 공간이 부족하다는 역설을 건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연출과 각본을 함께 맡은 사람이 에드워즈다. 폴과 주드가 부딪히는 동선도 그 동선 위에서 오가는 말도 같은 사람이 설계했다는 뜻이 된다.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가까워질수록 말이 어긋나는 구조 역시 한 사람의 손에서 함께 짜였다.
폴의 음악적 재능은 주드에게 유산인 동시에 저주다. 아버지가 뛰어난 음악가라는 사실은 딸에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음악적 DNA를 물려받았다는 가능성과,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주드가 뉴욕에서 싱어송라이터로 고전하는 이유는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비교의 무게다. 폴 롬바르드의 딸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음악을 독립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게 만든다. 이 구조는 예술가 가문의 2세가 겪는 보편적 딜레마의 축약이다. 부모의 유산을 활용하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부하면 가장 중요한 자원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폴과 주드가 함께 음악을 만드는 장면은, 이 딜레마에 대한 잠정적 해결을 제시한다. 아버지의 유산을 거부하는 것도, 종속되는 것도 아닌 세 번째 길. 협업. 두 세대의 음악적 언어가 만날 때, 과거와 현재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이고, 두 사람의 관계가 유일하게 대등해지는 순간이다.
다만 이 해결을 잠정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분명하다. 협업은 두 사람이 대등할 때만 성립하는 방식이다. 폴이 내놓는 이름은 이미 지나갔고 주드가 내놓는 이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값이 매겨지는 이름을 두 사람 모두 갖고 있지 않다. 영화가 이 장면을 중반부에 놓아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영화의 개봉 제목 'One More Time'은 앙코르의 외침이다. 관객이 무대를 떠나려는 가수에게 "한 번 더!"를 외치는 것. 폴에게 이 외침은 두 가지로 들린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라는 요구와, 더 이상 재현할 수 없다는 현실 사이의 긴장.
제작 당시 제목은 달랐다. 2015년 트라이베카 영화제에 'When I Live My Life Over Again'으로 걸린 영화가, 이듬해 개봉하면서 지금의 제목을 얻었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이 한 번 더 불러 달라는 외침으로 바뀌었다.
앙코르는 끝 뒤의 것이다. 공연이 끝났는데 다시 나오는 것. 이 구조가 폴의 인생 전체의 은유다. 전성기는 끝났지만 여전히 무대에 서고 싶은 남자. 끝났는데 끝내지 못하는 것 — 이것이 노화하는 예술가의 가장 근본적인 딜레마이고, 리브 어게인이 워컨의 몸을 통해 탐구하는 주제다.
러닝타임은 98분이고, 그 안에서 폴의 전성기와 그 이후가 모두 지나간다. 그 길이를 잡아낸 사람은 편집을 맡은 Mollie Goldstein이다. 끝난 뒤에 덧붙는 시간은 원래 길지 않다.
크리스토퍼 워컨이 노래를 부른다. 이것만으로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있다. 부모의 유산이 자녀에게 짐이 되는 구조, 명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인간, 끝났는데 끝내지 못하는 예술가의 딜레마. 이 주제들은 토니 에드만의 부녀 관계와 다른 톤으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부모가 되는 것은 무대에 서는 것과 같다. 관객(자녀)이 떠나도 무대는 남는다.
◆ 워컨의 노래 장면 — 배우의 실제 음악적 배경이 캐릭터에 어떤 진정성을 부여하는지 감지하라.
◆ 햄턴스의 공간 활용 — 넓은 공간이 어떻게 고립과 외로움의 시각적 표현이 되는지.
◆ 부녀의 음악적 대화 — 폴과 주드가 함께 음악을 만드는 장면에서, 두 세대의 언어가 어떻게 만나는지.
◆ 앙코르의 이중 의미 — 제목이 영화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하라.
◆ 토니 에드만(2016) — 동일한 큐레이션으로 소개된 작품. 부녀 관계의 어색함과 사랑을 전혀 다른 톤으로 다루는 작품. 빈프리트의 가짜 이빨과 폴의 마티니는 같은 목적(딸에게 닿기) 위한 다른 도구다.
◆ 코르사주(2022) — 나이 든 공인이 쇠락하는 명성과 박제된 이미지에 저항하는 초상. 폴의 '한물간 예술가' 정서와 결이 맞닿아, 사라져가는 영광 앞에 선 인간을 다른 시대·성별로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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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