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에게 인사하기 전에 흡입 장치부터 써야 한다. 의사는 가스를 들이마신 뒤 힘겹게 “봉주르”라고 말한다. 곁에 있던 남자도 같은 장치를 써서 인사를 돌려준다. 뤽 베송의 …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기 전에 흡입 장치부터 써야 한다. 의사는 가스를 들이마신 뒤 힘겹게 “봉주르”라고 말한다. 곁에 있던 남자도 같은 장치를 써서 인사를 돌려준다. 뤽 베송의 첫 장편 〈마지막 전투〉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이 두 마디뿐이다. 이름을 묻거나 사정을 털어놓기도 전에 말문이 다시 닫힌다. 평소라면 대화의 시작일 인사가 여기서는 어렵게 해낸 일이다.

그 인사에 이르기 전, 영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모래에 파묻힌 높은 건물에서 홀로 지내는 남자는 부품을 모아 비행기를 만든다. 지금 있는 곳을 떠나려는 사람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는 것은 독백이 아니라 조립 중인 물건이다. 아직 날지 못하는 비행기만으로도 이 거처에 계속 머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품을 얻는 일은 순탄하지 않다. 남자는 폐차가 쌓인 곳에 사는 무리에게서 필요한 것을 훔친다. 그곳에서는 몸집이 작은 남자가 좁은 통로로 들어가 물을 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누군가는 부품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물이 필요하지만, 서로 부탁하고 나누는 관계는 아니다. 남아 있는 물건과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의 위치가 곧 힘의 차이가 된다. 대사가 없어도 누가 다른 사람을 부리고 있는지는 드러난다.

비행기를 타고 떠난 남자가 이르는 도시에도 마음 놓고 들어갈 만한 곳은 드물다. 오래된 진료소에는 의사가 버티고 있고, 장 르노가 연기하는 덩치 큰 남자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의사는 출입구를 막아 그를 저지한다. 관객이 지켜보는 것은 문을 통과하려는 시도와 막아내는 방법이다. 문이 버티는 동안에는 안과 밖이 나뉘지만, 밖의 남자가 물러서지 않는 한 의사도 안심할 수 없다.
이 폐허가 원래 어떤 도시였는지 영화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베송은 실제 장소에서 촬영하면서도 특정 시대와 장소를 알아보기 어렵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흑백으로 찍고 가로로 긴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고른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건물과 잔해는 눈앞에 구체적으로 놓여 있지만, 익숙한 지명에 기대어 그곳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관객에게 필요한 길잡이는 남자가 만들고 있는 비행기, 의사가 지키는 문처럼 당장 쓰임을 알아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진료소에 들어가려는 덩치 큰 남자에게 공격당한 주인공은 상처를 입은 채 의사를 만난다. 의사는 그를 치료한다. 앞서 출입구를 막던 사람이 이번에는 낯선 사람을 돌보고 있으니, 이곳을 둘러싼 긴장에도 다른 여지가 생긴다. 누군가 곁에 왔다는 사실이 반드시 위협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동안 영화에는 식사하고 놀며 보내는 시간이 들어온다.
의사와 남자는 탁구를 친다. 쓸 만한 부품이나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던 모습 뒤에, 당장 목숨을 부지하는 일과 무관한 놀이가 놓인다. 탁구는 공을 돌려보내 줄 사람이 있어야 계속할 수 있다. 혼자 버텨온 남자가 상대와 한 차례씩 주고받는 모습에는 말이 없어도 알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두 사람에게 함께할 일이 생겼다.
가스를 들이마시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도 이런 시간 속에 있다. 잠깐 말을 할 수 있게 됐지만 의사와 남자는 세상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곁에 있는 상대에게 한마디를 건넨다. 관객은 의사가 다친 남자를 돌봐준 사정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짧은 인사를 이해하는 데 더 긴 대사가 필요하지 않다. 목소리로도 상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이 확인하는 순간이다.
말이 적다고 영화가 소리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바람 소리와 에릭 세라의 음악이 있고, 인물들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도 들린다. 말문이 막힌 세계의 풍경은 귀로도 전해진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 사정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으니, 두 남자가 힘을 들여 내는 작은 인사가 유난히 또렷하게 남는다.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행동은 문을 부수려는 시도일 수도, 상처를 돌보는 일일 수도 있다. 〈마지막 전투〉는 그 차이를 대사로 먼저 정리하지 않는다. 인물이 무엇을 들고 어디로 가는지, 상대가 그를 받아들이는지 지켜보게 한다. 함께 놀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 거칠고 황량한 풍경 속에서 뜻밖의 온기를 만든다.
◆ 아직 날지 못하는 비행기 — 남자의 거처에 놓인 비행기는 그가 다음에 무엇을 하려는지 알려준다. 필요한 부품을 구하는 일과 비행기를 만드는 일이 연결되면서, 말로 밝히지 않은 계획을 따라갈 수 있다. 폐허를 채운 물건 가운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가는지 살펴보면, 같은 잔해도 사람에 따라 다른 쓸모를 가진다는 점이 보인다.
◆ 진료소의 출입구 —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과 문을 지키는 의사의 입장을 함께 보자. 출입구가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밖의 사람이 어떤 방법을 쓰고 안의 사람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같은 문 앞의 긴장이 달라진다. 이후 의사에게 치료받는 남자의 모습은 이 공간에 또 다른 관계를 들인다.
◆ 탁구 상대가 생겼을 때 — 혼자 부품을 모으던 남자가 의사와 함께 놀이를 하는 시간에 주목할 만하다. 공을 건네고 돌려받으려면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식량이나 안전을 얻기 위해 상대와 겨루는 장면 뒤에 이 시간을 놓고 보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낸다는 말에 생존 이외의 즐거움도 들어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 말소리를 기다리는 귀 — 대사가 드문 만큼 바람과 움직임, 음악에 귀를 기울여보자. 이 영화의 침묵은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사람들은 소리 나는 세계에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가스를 들이마신 뒤 겨우 건네는 인사는 그 가운데 잠시 열리는 말문이다. 긴 설명 없이도 그 짧은 소리가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인지 전해진다.
◆ 서브웨이 (1985, 뤽 베송) — 쫓기던 남자가 파리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도시의 겉모습보다 피신한 사람이 발견하는 공간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함께 볼 만하다. 폐허의 물건들로 생존을 궁리하던 세계가, 일상의 지하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세계로 바뀐다.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1968, 조지 A. 로메로) — 낯선 사람들이 농가에 모여 바깥의 공격을 막는다. 한 건물 안에 있다는 사실과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집의 문과 창을 막는 행동이 안에 모인 사람들의 관계와 어떻게 얽히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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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