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아는 400년 동안 물에 빠져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그녀의 죽음은 무대 밖에서 전해진다. 시냇물에 떠 있는 몸, 꽃으로 장식된 시체.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오필리아는 400년 동안 물에 빠져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그녀의 죽음은 무대 밖에서 전해진다. 시냇물에 떠 있는 몸, 꽃으로 장식된 시체.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죽음 장면 중 하나. 그런데 오필리아는 왜 죽었는가. 정말로 미쳐서? 아니면 미친 척한 것인가.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가. 오필리아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리사 클라인의 2006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클레어 매카시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그 대답을 오필리아(데이지 리들리) 본인에게 맡긴다. 400년간 비극의 소도구였던 인물이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2018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재해석의 가장 대담한 시도 중 하나다. 고전의 구조는 뒤집되, 고전의 언어는 버리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오필리아의 대사는 전체 분량의 5%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 폴로니어스(도미닉 마팸)의 딸이고 햄릿(조지 맥케이)의 연인이며, 두 남자의 서사에 종속된 존재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햄릿의 감시자가 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쳐버리며, 물에 빠져 죽는다. 그녀의 행위에는 독립적 동기가 없다. 모든 것을 남성의 서사가 결정한다.
이 영화가 그 구조를 전복한다. 오필리아에게 1인칭 내레이션을 부여하고, 독립적 동기를 설계하며, 원작에 없는 서사적 경로를 만든다. 오필리아는 더 이상 아버지와 연인 사이에서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관찰하고, 판단하며, 행동한다. 엘시노어 성의 정치적 음모를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목격하면서, 스스로 살아남을 전략을 세운다.
이 전복에서 가장 영리한 대목은 원작의 사건을 그대로 둔 채 시점만 바꾼다는 점이다. 햄릿의 유명한 독백("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오필리아에게 던지는 "수녀원으로 가라"는 대사, 폴로니어스의 죽음. 이 모든 사건이 오필리아의 시선에서 재맥락화된다. 같은 사건도 시선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이것이 시점의 정치학이다.
나오미 왓츠는 거트루드와 메칠드(허구의 인물)를 혼자 두 역으로 연기하며, 원작에 없는 서사적 층위를 더한다. 왕비 거트루드의 이야기가 독자적인 깊이를 얻으면서, 엘시노어 성의 여성 경험이 오필리아 한 명에 갇히지 않고 넓어진다. 같은 성 안에서 두 여성이 서로 다른 형태의 억압을 겪는다. 이 병렬이 《햄릿》의 남성 중심 서사에 여성적 대항 서사를 세운다.
오필리아가 물에 빠지지 않는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급진적인 결정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오필리아의 익사는 비극의 필연이었다. 미친 여자의 유일한 출구. 이 영화에서 익사는 위장이 된다. 오필리아는 죽은 척하고 살아남는다. 비극의 소도구에서 벗어나, 자기 서사의 주체가 된다.
이 변경이 원작 모독인가, 해방인가. 셰익스피어 순수주의자는 전자를 주장할 것이고,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후자를 주장할 것이다. 오필리아는 이 논쟁을 의식하면서도, 후자의 편에 확고히 선다. 오필리아에게 선택지가 있었다면, 그녀는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전제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영화도 받아들일 수 없다.
데이지 리들리는 이 오필리아에게 물리적 강인함을 불어넣는다. 《스타워즈》의 레이 역으로 알려진 리들리는, 연약한 미친 소녀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그녀의 오필리아는 눈물을 흘리되 무너지지 않고, 미친 척하되 정신을 유지하며, 물에 빠지되 헤엄쳐 나온다. 이 강인함이 원작의 오필리아와 이 영화의 오필리아를 구분하는 물리적 증거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1852년 회화 《오필리아》는 물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시체를 그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죽음의 이미지 중 하나다. 오필리아는 이 이미지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아름다운 시체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 죽음이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미학적 관습을 파괴하는 것. 살아남는 것이 죽는 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
《햄릿》의 엘시노어 성은 남성의 전쟁터다. 클로디어스(클라이브 오웬)의 찬탈, 햄릿의 복수, 폴로니어스의 정치적 계략 — 이 모든 것이 남성의 서사다. 여성은 이 전쟁의 도구로만 쓰인다. 거트루드는 왕위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도구이고, 오필리아는 햄릿을 감시하는 도구다.
오필리아는 이 성 안에 또 하나의 전쟁을 들여놓는다. 여성의 전쟁. 성 안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의 전쟁. 거트루드의 전략은 순응이다. 권력자의 아내가 됨으로써 생존한다. 오필리아의 전략은 관찰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됨으로써 모든 것을 본다. 메칠드(나오미 왓츠의 두 번째 역)의 전략은 탈출이다. 성을 벗어나 숲에서 산다.
이 세 전략은 여성이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 택할 수 있는 길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순응, 관찰, 탈출. 각 전략에는 비용이 있다. 순응의 비용은 자아의 소거이고, 관찰의 비용은 고독이며, 탈출의 비용은 사회적 존재의 상실이다. 비용을 치르지 않는 선택은 없다.
의상 디자인이 이 여성 전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거트루드의 화려한 왕비 의상은 순응의 갑옷이다. 오필리아의 소박한 드레스는 관찰자의 위장이다. 메칠드의 거친 옷은 탈출자의 자유다. 의상이 캐릭터의 전략을 몸에 입힌다.

고전을 재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원작의 구조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안티고네의 접근법). 다른 하나는 원작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시점만 바꾸는 것. 오필리아는 후자를 택한다 — 《햄릿》의 사건은 거의 그대로 일어나되, 그것을 관찰하고 겪는 주체가 바뀐다.
이 접근의 장점은 원작의 팬에게 인식의 전환을 준다는 점이다. "아, 그 장면이 오필리아에게는 이렇게 보였구나."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효과(defamiliarization). 단점은 원작을 모르는 관객에게 이 전환의 재미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햄릿》을 모르는 관객에게 이 영화는 그냥 중세 로맨스다.
엇갈린 평가가 이 접근의 양면을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재해석으로는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독립된 한 편의 영화로서 서사적 완성도에는 물음표를 찍는 비평이 함께 있다. 원작에 기대면서도 원작과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이중 과제를, 이 영화는 끝까지 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과와 별개로, 이 시도에는 의의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여성 캐릭터를 주체화하려는 움직임이 2010년대 이후 문학과 영화에서 활발해지고 있다. 오필리아뿐 아니라 레이디 맥베스, 줄리엣, 비올라가 그 대상이다. 오필리아는 이 움직임의 일부이자, 이 움직임이 고전을 읽는 우리의 시야를 어떻게 넓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오필리아는 400년간 서양 문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해자였다. 물에 떠 있는 시체가 예술 작품이 되고, 미친 여자의 노래가 문학적 아이콘이 되었다. 오필리아는 이 아이콘에서 인간을 꺼내온다. 시체가 일어나고, 미친 여자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피해자가 생존자가 된다. 이 변환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변환 자체의 필요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026년의 관객에게 이 영화가 의미 있는 것은, 고전의 여성 캐릭터를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필리아가 물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은 한 영화의 결말이 아니다. 문화적 변화의 시작이다.

◆ 《햄릿》의 유명 장면들이 오필리아 시점에서 재구성되는 순간 — "사느냐 죽느냐"의 독백이 오필리아에게는 어떻게 들리는지. 원작을 아는 관객에게 열리는 인식의 전환.
◆ 리들리의 물리적 강인함 — 레이(《스타워즈》)의 배우가 오필리아를 연기할 때, 연약한 미친 소녀의 이미지가 어떻게 전복되는지.
◆ 물 장면의 시각적 처리 — 밀레이의 회화와의 대비. 같은 이미지를 이 영화가 어떤 태도로 다시 찍는지.◆ 거트루드와 오필리아 사이의 역학 — 왕비와 시녀의 관계가 같은 성 안의 여성 동맹으로 전환되는(혹은 전환되지 못하는) 과정.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셀린 시아마) — 여성의 시선으로 구축된 서사. 시아마의 18세기 여성과 매카시의 중세 여성이 다른 시대에서 같은 종류의 주체성을 추구한다.
◆ 코르사주 (2022, 마리 크로이처) — 역사 속 여성의 재해석. 엘리자베트 황후를 재해석한 크로이처와 오필리아를 재해석한 매카시가 같은 전략을 쓴다. 비극적 여성을 능동적 주체로 바꿔 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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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