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에서 오필리아는 대사가 많지 않다. 큰 사건은 대부분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결정되고, 그녀에게는 결과만 전달된다. 400년 동안 오필리아는 그런 인물이었다. 시드니에서 온…
「햄릿」에서 오필리아는 대사가 많지 않다. 큰 사건은 대부분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결정되고, 그녀에게는 결과만 전달된다. 400년 동안 오필리아는 그런 인물이었다. 시드니에서 온 감독 클레어 매카시는 이 순서를 바꿔 보기로 했다. 궁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오필리아가 보고 듣는 만큼만 화면에 담았다. 그렇게 하면 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이 영화는 그것을 확인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결정은 캐스팅 표에 적혀 있다. 나오미 왓츠가 왕비 거트루드와 메흐틸트를 함께 맡는다. 궁정 안에 있는 여자와 궁정 바깥 숲에 사는 여자를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
두 인물을 구분해 주는 것은 의상과 공간이다. 얼굴은 같다. 왓츠는 둘을 표정의 크기로 가르지 않고 말의 속도와 시선이 머무는 시간으로 가른다. 궁정의 거트루드는 말을 고르고, 숲의 메흐틸트는 그럴 필요가 없다. 관객은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먼저 알아채고, 왜 닮았는지를 나중에 생각하게 된다.
이 캐스팅이 대사 없이 하나를 말한다. 궁정에 남은 여자와 궁정에서 밀려난 여자가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두 사람의 처지를 가른 쪽은 성격이 아닌 자리다. 영화는 이 말을 대사로 하지 않고 배우 한 명으로 처리한다.
주연 오필리아는 데이지 리들리가 맡았다. 리들리의 오필리아는 자주 문 옆이나 계단 중간에 서 있다. 방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듣고 있지만 그 방에 속하지는 않은 자리다. 궁정에서 그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동선이 먼저 알려준다.
원작에서 무대를 지배하던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는 오필리아가 있는 방에만 나온다. 클로디어스는 클라이브 오언, 햄릿은 조지 매케이, 레어티스는 톰 펠턴, 호레이쇼는 데번 테렐이 맡았다. 선왕 햄릿은 너새니얼 파커,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도미닉 매프햄이다.
햄릿의 유명한 독백들은 짧아지거나 아예 화면 밖으로 밀린다. 원작을 아는 관객에게는 빠진 자리가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다. 남자들이 큰 소리로 결정을 내리는 동안 그 방 안팎에서 여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화면에 남는다.
이 재배치가 원작을 고치지는 않는다. 오필리아에게 일어나는 일은 셰익스피어가 쓴 그대로다. 달라지는 쪽은 그 일이 벌어질 때까지 관객이 무엇을 보고 있었느냐다. 결과만 전달받던 인물을 결정이 만들어지는 자리에 세워 두면 같은 결말도 다른 무게로 도착한다.
러닝타임 106분도 그 계산에서 나온 숫자다. 「햄릿」을 온전히 상연하면 네 시간에 이르기도 한다. 매카시는 절반 이하로 줄이면서 무엇을 남길지가 아닌 누구의 하루를 따라갈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궁정 정치의 세부가 빠진 만큼 오필리아의 시간이 늘어났다.
각본은 세미 첼라스가 썼다. 《매드 맨》의 작가다. 1960년대 광고 회사에서 여자들이 회의실 바깥에 서 있는 장면을 오래 써 온 사람이 중세 궁정으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출발점도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리사 클라인이 2006년에 낸 소설이 원작이다. 이 사실이 생각보다 중요하다. 매카시가 각색한 쪽은 희곡이 아니라 이미 한 번 오필리아 쪽으로 옮겨 놓은 판본이다. 원작을 두 겹 거친 결과가 화면에 남아 있다. 셰익스피어가 한 줄로 처리한 자리에 소설이 붙여 놓은 사정이 있고, 영화는 그 사정을 장면으로 만든다.
화면을 만든 사람들도 이름이 있다. 촬영은 덴슨 베이커, 음악은 스티븐 프라이스, 의상은 이탈리아에서 시대 의상을 오래 만들어 온 마시모 칸티니 파리니가 맡았다. 미술은 데이비드 워런, 편집은 루크 던클리다.
이 조합이 만드는 것은 화려한 궁정이 아니라 질감이다. 오필리아가 궁정 안에 있을 때와 숲에 있을 때 화면에 들어오는 색의 수가 다르다. 벽과 옷감이 빛을 되돌려 보내는 양도 다르다. 인디 예산으로 만든 시대극인데 화면이 얇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큰 세트를 여러 개 세우는 대신 한 인물이 지나는 공간마다 다른 온도를 준 것이다.
오필리아가 한 번의 시도였는지는 그 뒤의 이력이 답한다. 매카시는 2020년에 「더 루미너리스」를, 2021년에 「도미나」를 연출했다. 둘 다 시리즈다.
「더 루미너리스」는 19세기 뉴질랜드 서해안의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삼는다. 금을 찾아 몰려든 남자들의 시대인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쪽은 그 틈에 낀 젊은 여자다. 「도미나」는 리비아 드루실라가 로마에서 권력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간다. 로마사는 오래도록 황제들의 연대기로 쓰였고, 이 시리즈는 그 시기를 한 여자의 동선으로 다시 짠다.
세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전부 결말이 이미 알려진 이야기다. 리비아가 어떻게 되는지, 골드러시가 어떻게 끝나는지, 오필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관객은 처음부터 안다. 매카시가 고르는 쪽은 놀라운 결말이 아니라 그 결말을 겪는 사람이다.
그 앞의 이력도 방향이 다르지 않다. 2010년의 「더 웨이팅 시티」는 아이를 데리러 콜카타에 온 호주 부부의 이야기이고, 카메라는 일이 처리되는 사무실보다 기다리는 사람 쪽에 오래 머문다. 2013년에는 여러 감독이 나눠 만든 옴니버스 「더 터닝」에 한 편을 보탰다.
오필리아는 완결된 걸작이 아니다. 궁정 정치의 뒷부분이 급하게 정리되고, 원작을 아는 관객에게는 익숙한 대목이 설명처럼 지나간다. 2018년 선댄스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 평가가 갈린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이 영화가 하려던 일은 완성도 겨루기가 아니었다. 400년 동안 이야기의 가장자리에 있던 인물을 가운데로 옮기면 무엇이 보이는지 확인하는 실험이었고, 그 실험이 이후 두 시리즈로 이어졌다. 감독의 이력에서 이 영화가 놓인 자리를 알고 보면 미완성으로 보이던 대목이 다음을 위한 연습으로 읽힌다.
「햄릿」을 학교에서 읽고 만 사람에게도 이 영화는 다른 입구가 된다. 줄거리를 다시 배울 필요가 없으니 처음부터 인물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보는 일이 지루한지 아닌지는 누구를 따라가느냐가 정한다. 이 영화는 따라갈 사람을 한 명 바꿔 놓았다.
◆ 왓츠의 두 얼굴 — 거트루드와 메흐틸트를 가르는 것은 의상과 공간뿐이다. 같은 배우가 말의 속도와 시선의 길이를 어떻게 달리 쓰는지 보라.
◆ 오필리아가 서 있는 자리 — 문 옆, 계단 중간, 방의 가장자리. 듣고는 있지만 그 방에 속하지 않은 위치가 반복된다.
◆ 햄릿이 말하지 않는 시간 — 원작에서 길었던 독백이 여기서는 얼마나 남았는지,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왔는지 견주어 보라.
◆ 궁정 안과 숲의 색 — 오필리아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화면에 들어오는 색의 수가 달라진다. 옷감이 빛을 얼마나 되돌려 보내는지에 주의를 두고 보라.
◆ 안티고네 (2019, 소피 데라스프) —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캐나다 이민 가정의 십대에게 옮겼다. 고전이 이미 적어 둔 결말을 한 사람의 오늘로 다시 겪게 한다는 점에서 같은 자리에 선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셀린 시아마) — 같은 해에 나온 18세기 이야기. 매카시가 캐스팅으로 처리한 것을 시아마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시선으로 처리한다.
◆ 코르사주 (2022, 마리 크로이처) — 역사가 이미 결말을 적어 둔 여자를 다시 따라간다. 오필리아와 엘리자베트는 다른 시대에 있지만 놓인 자리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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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