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에게 야한 책을 읽어주는 시녀. 〈오필리아〉에는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는 말만으로는 떠올리기 어려운 시간이 있다. 데이지 리들리가 연기하는 오필리아는 나오미 왓츠의 거트루드 곁에…
왕비에게 야한 책을 읽어주는 시녀. 〈오필리아〉에는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는 말만으로는 떠올리기 어려운 시간이 있다. 데이지 리들리가 연기하는 오필리아는 나오미 왓츠의 거트루드 곁에서 책장을 읽는다. 듣는 왕비에게도 취향이 있고, 읽는 시녀에게도 새로 알게 되는 세계가 있다. 햄릿의 연인과 어머니로만 두 사람을 소개하면 놓치는 장면이다.

오필리아는 어머니 없이 자라 왕비의 시녀가 된다. 성 안에 들어왔다고 귀족들과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은 아니다. 왕비의 곁에 머물 수 있지만 그곳의 권력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다. 이 차이를 두고 보면 책을 읽는 시간이 더 흥미롭다. 왕비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입으로 옮기는 일은 시녀의 일이면서, 두 여성이 은밀한 즐거움을 나누는 기회이기도 하다.
클레어 매카시는 이 장면을 각본가 세미 첼라스의 아이디어라고 설명했다. 감독이 흥미롭게 여긴 것은 오필리아가 지식을 얻는 일이었다. 세상의 욕망과 감각을 알아가는 경험이 그를 어떻게 바꾸는가. 정숙한 여인이어야 한다는 기대 안에만 두면 설명하기 어려운 호기심이, 왕비의 방에서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된다.
거트루드에게는 자신의 외로움과 질투도 있다. 매카시는 왓츠와 함께 거트루드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사랑과 권력 사이에 놓인 사람으로 보면 왕비의 관심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누군가를 가까이 두는 마음이 늘 상대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복잡해진다.

오필리아와 햄릿은 서로에게 끌리고 몰래 사랑을 키운다. 그런데 왕의 죽음 뒤 햄릿의 관심은 복수로 향한다. 왕자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고 갚아야 한다는 목적이 생긴다. 그를 사랑하는 오필리아가 그 목적을 똑같이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함께할 미래를 원하는 사람과 복수해야 할 과거에 붙들린 사람은 같은 일을 보아도 급한 것이 다르다.
리사 클라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햄릿의 이야기를 오필리아의 자리에서 다시 엮는다. 시점이 바뀌어도 성을 지배하는 권력이 오필리아에게 넘어오지는 않는다. 그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뜻을 헤아려야 한다. 감독도 이 인물이 권력을 움직이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는 1851~1852년에 물에 떠 있는 오필리아를 그렸다. 〈햄릿〉 속 죽음의 장면을 옮긴 그림이다. 영화도 라파엘전파와 낭만주의 회화를 참고했다. 길게 늘어진 옷과 붉은 머리, 성과 물가의 풍경에는 그 회화들을 떠올릴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기존의 이미지를 알아볼 수 있게 하면서,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더 오래 따라가는 방식이다.
매카시는 덴마크의 풍경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체코의 성들을 살펴 필요한 질감과 빛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촬영을 위해 일부 내부 공간은 세트로 만들었다. 영화의 성은 한 장소를 옮긴 결과라기보다 오필리아가 지낼 세계를 여러 곳에서 모아 만든 공간이다. 아름다운 방이 누구에게는 일터이고 누구에게는 혼자 남는 장소라는 차이까지 보면, 장식 너머의 생활이 눈에 들어온다.
오필리아에게 어떤 결말이 주어지는지만 궁금해하면, 그 전에 만나는 사람과 배우는 것들을 지나치기 쉽다. 왕비에게 읽어주는 책, 사랑하는 왕자가 몰두하는 일, 성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 시간이 있다. 익숙한 인물의 이름을 알고 있어도 그 생활은 새롭게 볼 수 있다. 〈오필리아〉는 누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지에 따라 같은 성 안에서 들리는 말과 보이는 사람이 달라지는 영화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셀린 시아마) —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와 모델이 서로를 관찰하고 그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림 속 여인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정하는 과정에 그 인물의 말이 들어온다. 익숙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과 그 이미지 안에 있는 사람을 함께 본다는 점에서 이어볼 만하다.
◆ 코르사주 (2022, 마리 크로이처) — 황후 엘리자베트가 요구받는 공적인 모습과 혼자 있을 때의 생활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자신의 몸과 시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트루드의 사적인 바람과 왕비라는 자리를 함께 보았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질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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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