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의 나라〉를 촬영한 날은 일곱 날이다. 배우들과 연습한 기간은 두 달이었다. 정형석은 카메라를 켜기 전에 모든 장면을 함께 분석했다. 현장에서 짧게 찍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
〈성혜의 나라〉를 촬영한 날은 일곱 날이다. 배우들과 연습한 기간은 두 달이었다. 정형석은 카메라를 켜기 전에 모든 장면을 함께 분석했다. 현장에서 짧게 찍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그보다 훨씬 긴 준비가 있었다.
정형석은 배우로 일했고, 연극을 쓰고 연출했다. 영화 현장에 가져온 것도 배우와 장면을 맞춰가는 그 경험이었다. 생활비를 벌려고 하루를 쪼개 쓰는 〈성혜의 나라〉의 여성과 연극을 하고 싶어 극단을 찾아온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의 여성은 처지도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두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는 공통된 고민이 있다. 이 사람을 설명할 말을 얼마나 붙일지, 그가 행동하고 말하는 시간을 얼마나 보여줄지 정하는 일이다.
정형석은 이십 대에 십 년가량 연극배우로 지냈다. 서른 즈음에는 앞으로도 같은 일을 계속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고, 다른 일도 해보고 싶었다. 글쓰기를 배운 뒤 방송과 영화의 대본을 썼다. 연기하던 사람이 글을 쓰고, 쓴 것을 연출하고, 제작까지 맡게 됐다. 한 직업을 그만두고 다음 직업으로 옮겨갔다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씩 늘어난 경력이다.
그는 〈성혜의 나라〉를 준비하며 배우에게 현장에서 무엇을 요구할지 미리 이야기했다. 함께 장면을 분석하고 연습하면서 각 배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살폈다. 배우가 카메라 앞에 선 뒤에야 감독의 뜻을 짐작해야 하는 상황을 줄이려는 방식이었다. 실제 촬영에서는 대부분 한두 번의 테이크로 장면을 마쳤다고 한다.
연극에서 알던 배우가 많다는 사정도 캐스팅에 도움이 됐다. 정형석은 평소의 작업을 통해 누가 어떤 배역에 어울릴지 생각해둘 수 있었다.
〈성혜의 나라〉는 처음에는 단편으로 구상됐다. 그런데 정형석은 뒤에 나올 성혜의 선택을 관객이 이해하려면, 그가 평소 어떻게 사는지 충분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일과를 담다 보니 영화가 길어졌다. 큰 사건을 더 보태서 장편이 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활에 배정한 시간이 늘어난 경우다.
성혜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가족을 돌보고, 그 사이에 자신의 미래도 준비해야 한다. 각각만 보면 특별한 사건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일들이다. 하지만 하루에 전부 넣고 나면 남는 시간이 거의 없다. 일하는 장면을 짧은 몇 컷으로 요약하면 관객은 그가 바쁘다는 정보만 얻는다. 비슷한 일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음 일을 시작하기 전에 쉬어갈 틈이 있는지도 함께 보게 된다.
정형석은 연극을 하려는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오는 모습을 가까이서 봤다. 좋아하는 일에 쏟고 싶은 힘을 생활비를 버는 데 먼저 써버린 사람들이었다. 성혜의 일상에도 그런 시간의 부족이 있다. 취업이나 자립을 먼 목표로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 잠을 얼마나 잘 수 있는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생활이다.
이 영화에서는 음악으로 성혜의 감정을 거들지 않는다. 정형석은 인물에게서 거리를 두고 일상을 지켜보려 했고, 단조로운 생활을 보여주는 데 흑백이 맞는다고 여겼다. 관객에게 그의 사정을 납득시키는 일은 주로 행동과 반복에 맡겨졌다. 흑백 화면이라는 외형보다, 영화가 그 안에서 한 사람의 하루를 얼마나 오래 지켜보는지가 중요해진다.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에서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말한다. 극단을 이끄는 해영과 새로 들어온 혜리 주변에는 연기와 예술에 대한 말, 서로에 대한 짐작이 오간다. 박호산이 연기하는 해영은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온 사람이고, 전혜연이 맡은 혜리는 이제 막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이다. 경력의 차이는 누가 더 자신 있게 말하는지에도 드러난다.
혜리가 서울대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주변 사람들은 그 말에 의미를 보태기 시작한다. 혜리의 행동을 보기 전에 학력에 맞는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다. 정형석은 혜리를 단순하고 직선적인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이 설명을 떠올리면 영화 제목의 ‘이상한’이라는 말도 곧바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혜리가 하는 말 자체와,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만들어내는 뜻 사이를 살피게 된다.
정형석은 이들의 대화를 짧은 컷으로 잘게 나누지 않으려 했다. 한 장면을 길게 찍고 카메라를 옆으로 움직이는 팬을 택한 데에는 대화의 흐름을 살리려는 생각이 있었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대답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남의 말을 듣는 태도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음악에 대한 선택은 〈성혜의 나라〉와 달랐다. 모그에게 맡긴 음악이 처음 도착했을 때 정형석은 예상한 방향과 달라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화면에 놓고 보면서 인물과 음악 사이의 아이러니가 맞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앞선 영화에서 음악을 덜어냈던 감독은 이번에는 예상 밖의 음악을 받아들였다.
정형석의 영화를 나란히 보면 말을 적게 하는 사람과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재미가 다르게 생긴다. 성혜에게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고, 극단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 앞에서 내놓고 싶은 말이 있다. 일과 대화를 충분히 따라가다 보면 인물이 스스로 내세우는 모습과 실제로 처한 형편을 따로 볼 수 있게 된다.
배우로 일해온 감독이라는 경력도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촬영 전에 장면을 함께 준비하고, 카메라 앞에서는 배우가 행동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한다. 영화에 나온 대사의 뜻만 읽던 눈을 잠시 옮겨, 상대의 말을 기다리거나 다음 일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지는 작업이다.
◆ 하루에 남는 시간 — 〈성혜의 나라〉에서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만큼 일과 일 사이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보자. 이동하고 식사하고 가족을 챙기는 시간을 합치면 성혜에게 남는 하루가 달라진다. 비슷한 일상을 다시 보여줄 때는 앞서 했던 일을 기억한 채 그의 다음 행동을 보게 된다. 하루를 따라가고 나면 미래를 준비하라는 말이 이 사람에게 얼마나 어려운 요구인지 생각하게 된다.
◆ 표정과 행동을 함께 읽기 — 정형석은 대사가 적은 이 영화에서 배우의 움직임과 표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송지인의 얼굴에서 어떤 기분이 먼저 읽히는지, 뒤이은 행동을 보고 그 짐작이 바뀌는지 비교해보자. 감정을 말해주는 대사가 없어도 얼굴과 행동이 어울리거나 어긋나는 데서 인물을 알아갈 수 있다. 같은 표정이 다른 상황에서는 어떻게 느껴지는지도 살펴볼 만하다.
◆ 남의 말을 듣는 사람 —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의 대화에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함께 살펴보자. 혜리가 한 말을 주변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학력을 알고 난 뒤 어떤 기대를 보태는지에 차이가 생긴다. 대화가 길게 이어질 때는 대답의 내용뿐 아니라 대답하기까지의 시간도 남는다. 누가 더 옳은 말을 하는지 고르기 전에 두 사람이 정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 흑백 너머의 차이 — 두 영화의 흑백 화면을 본 뒤에는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도 비교해보자. 〈성혜의 나라〉는 음악 없이 인물의 일상을 따라가고,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는 음악과 인물 사이에 어긋나는 느낌을 더한다. 화면에 보이는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음악이 다른 인상을 줄 때 자신이 누구의 말을 믿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색채보다 소리를 비교하면 두 작품의 차이가 잘 들린다.
◆ 〈성혜의 나라〉 — 생계와 가족, 미래를 준비할 일이 한 사람의 하루에 몰려든다. 감독이 짧게 줄일 수 없다고 판단한 일상과 배우의 반복되는 행동을 함께 볼 수 있다.
◆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 한 신입 단원의 등장으로 극단 안의 기대와 짐작이 드러난다. 정형석이 오래 몸담은 무대의 관계를, 대화가 이어지는 영화의 시간으로 옮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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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