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대신 어린 자신을 만나게 한 감독 | MovieLAB LAB

최진영은 꿈에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남자는 자신이 최진영의 또 다른 자아라고 했다. 감독은 이 꿈에서 자신을 아끼는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첫 장편 〈태어나길 잘했어〉(…

연인 대신 어린 자신을 만나게 한 감독 | MovieLAB LAB

최진영은 꿈에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남자는 자신이 최진영의 또 다른 자아라고 했다. 감독은 이 꿈에서 자신을 아끼는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첫 장편 〈태어나길 잘했어〉(2020)를 완성하면서 꿈속의 연인을 그대로 데려오지는 않았다. 벼락을 맞은 주인공 춘희 앞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나타난다. 사랑에 빠질 상대를 만나던 이야기에서, 지나온 자신과 함께 지내야 하는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것과 예전의 나를 곁에 두는 일은 사뭇 다르다. 잘 숨겨두었다고 생각한 모습까지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진영은 춘희가 어린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지 고민하며 각본을 고쳐갔다. 이 변화는 두 명의 춘희를 연기한 배우들과 그들을 화면에 담는 방법에도 이어졌다.

태어나길 잘했어의 한 장면

꿈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지 않은 이유

감독은 남성과의 사랑을 통해 춘희의 삶을 풀어주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시나리오를 고치는 동안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되짚었고, 유독 힘들게 남은 시기에 닿았다. 최진영에게 1990년대는 즐겁고 부끄러운 기억이 뒤섞인 청소년기이면서, 외환위기 이후 주변 사람들의 곤경을 가까이서 접한 때였다. 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같은 동네 학생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들었다.

〈태어나길 잘했어〉의 어린 춘희는 부모를 잃은 뒤 외가에서 눈치를 보며 자란다. 성인이 된 춘희 앞에 나타나는 것은 막연히 순수하고 귀여웠을 어린 시절이 아니다. 부모 없이 살아남아야 했던 시기의 자신이다. 감독은 어린 춘희를 불러내면서, 지금의 춘희가 아직 마주하기 어려운 시간을 영화 한가운데 놓았다. 과거를 바꿀 방법을 찾는 일보다 그때의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가 중요해진다.

이 설정을 바꾼 데에는 감독 자신의 생각이 달라진 과정도 있었다. 최진영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며, 이성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이야기를 다시 검토했다고 밝혔다. 처음 떠올린 꿈에 충실한 것보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에 맞게 고치는 편을 택했다. 완성작에서 춘희에게는 주황이라는 새로운 인연도 생긴다. 하지만 춘희가 자기를 대하는 문제까지 연애가 해결해주는 이야기를 만들지는 않으려 했다.

붉은 외투에 흰 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푸른 한복을 입은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

춘희를 우울하게만 두지 않기

각본 속 춘희의 성격도 처음부터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 최진영이 쓴 춘희는 더 어둡고 답답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른 춘희를 맡은 강진아는 이런 우울한 인물의 틀을 벗어나보자고 제안했다. 감독 역시 춘희를 아낀다면 여러 감정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고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춘희를 불행한 일만 겪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기로 하고 인물의 분위기를 조정했다.

감독은 강진아를 사적으로 만났을 때 알게 된 유쾌함도 춘희의 성격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배우에게서 처음 눈여겨본 얼굴에 더해, 만나서 대화해야 알 수 있는 면을 배역에 가져온 셈이다. 각본에 쓴 인물과 배우가 꼭 닮았는지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은 만남이었다.

춘희가 손으로 마늘을 잘 까는 설정도 이런 관심에서 나왔다. 그는 다한증 때문에 다른 사람과 손잡는 일조차 편하지 않다. 감독은 그 손으로 잘하는 일이 있기를 바랐고, 춘희에게 마늘을 까는 일을 주었다. 불편한 손을 먼저 보여준 다음 고쳐야 할 문제로만 남겨두는 대신, 같은 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모습을 함께 둔다. 춘희의 몸을 한 가지 사정으로 정리하기 어려워지는 구체적인 선택이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여성이 간식을 먹고 있다.

어린 춘희에게도 자기 장면을 주다

어른 춘희는 강진아가, 어린 춘희는 박혜진이 연기한다. 두 인물을 함께 보여주는 일에는 캐스팅 이후에도 결정할 것이 남아 있었다. 어린 춘희를 그저 성인이 떠올리는 옛 기억으로 보이게 할 것인지, 지금 눈앞에 나타난 사람으로 보이게 할 것인지다. 직접 편집도 맡은 최진영은 과거가 현재처럼 느껴지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감독은 한 배우의 어깨 너머로 다른 배우를 보는 구도를 빼고 콘티를 짰다. 두 인물을 각각 담은 장면의 길이도 서로 맞추었다고 한다. 어른 춘희가 바라보는 대상에 그치지 않고, 어린 춘희에게도 혼자 화면에 남는 시간을 주려는 선택으로 읽힌다. 어른의 표정만 따라가다가 아이를 잠깐 확인하는 식으로 이 만남을 끝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린 춘희가 나타나는 때에도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제작진은 춘희가 슬프거나 힘들 때 나타나는 것인지 논의했지만, 감독은 그런 규칙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어린 자신은 필요할 때 불러내 조언을 듣는 존재가 아니다. 불쑥 나타나 성인이 된 나의 생활에 끼어든다. 춘희에게는 그 아이를 보지 못한 척하거나 마음에 드는 기억만 고르기가 어려워진다.

지금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난다고 곧바로 다정해질 수 있을까. 〈태어나길 잘했어〉는 그 만남을 기분 좋은 선물로만 준비하지 않는다. 지금도 살아가기 빠듯한 춘희에게 어린 자신까지 나타난 상황이다. 상대가 남이라면 묻지 않았을 말을 자기에게는 할 수도 있다. 두 춘희가 마주하는 일을 그렇게 생각하면, 과거의 나를 위로한다는 익숙한 말에도 간단히 넘기기 어려운 부분이 생긴다.

최진영은 처음의 꿈을 고쳤고, 배우의 제안을 받아 인물의 분위기도 고쳤다. 영화의 출발점을 아는 재미는 완성작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춘희를 안쓰럽게만 보는 순간이 온다면, 그가 다른 감정을 내보이는 때도 함께 보자. 감독과 배우가 함께 남겨두려 했던 한 사람의 성격이 그곳에 있다.

감상 포인트

마늘을 까는 손 — 춘희의 손은 다른 사람과 닿기 어려운 몸의 일부이면서 일을 해내는 손이기도 하다. 다한증과 마늘 까기가 같은 인물에게 주어진 이유를 생각하며 보면, 신체의 불편함이 그 사람에 관한 설명 전부가 되지 않도록 한 각본의 선택을 읽을 수 있다. 능숙하게 해내는 일이 춘희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도 눈이 간다.

어린 자신이 불쑥 나타날 때 — 어린 춘희의 등장을 어떤 감정의 신호로만 풀 필요는 없다. 감독은 어른 춘희가 슬프거나 힘든 때에만 아이가 나타나는 규칙을 두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등장 이유를 맞히기보다, 지금 춘희가 하던 일과 그 앞에 어린 자신이 나타난 상황을 함께 보자. 둘의 만남이 늘 반가울 수만은 없는 사정이 보인다.

두 춘희가 각자 화면에 남는 모습 — 대화하는 두 얼굴 가운데 어느 한쪽만 이야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보면 좋다. 어린 춘희가 어른의 사연을 설명하는 대상으로만 보이는지, 자기 표정과 말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지 살펴보자. 화면이 어린 춘희에게 머물 때 어른의 설명과는 다른 감정이 보이는지 눈여겨볼 만하다.

춘희의 기분이 달라지는 순간 — 춘희를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정서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사람을 만나거나 혼자 일할 때 드러나는 기분의 차이를 보자. 어두운 사연을 가진 인물을 우울하게만 남겨두지 않으려던 강진아와 최진영의 대화가 참고가 된다. 불행한 과거를 알고도 현재의 성격을 더 알아가게 되는지가 이 인물을 만나는 재미다.

관련 작품

홈리스 (2020, 임승현) — 아이의 병원비가 급해진 한결은 한 노인의 빈집으로 향한다. 춘희의 외가처럼, 지붕 아래 들어가는 일과 그곳을 내 집으로 여길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정말 먼 곳 (2021, 박근영) — 화천의 목장에서 아이를 키우던 진우 앞에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여동생이 나타난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서로의 삶에 개입할 자격이 되는지를 두 작품의 인물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십개월의 미래 (2021, 남궁선) — 예상하지 못한 임신을 알게 된 미래에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답을 내놓는다. 남들이 권하는 삶과 내가 택하고 싶은 삶이 어긋나는 사정을, 춘희의 이야기와 다른 상황에서 이어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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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