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마천루 앞, 카메라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빽빽한 창문들을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간 카메라는 어느 층에서 멈춘 뒤 유리 너머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마천루 앞, 카메라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빽빽한 창문들을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간 카메라는 어느 층에서 멈춘 뒤 유리 너머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안쪽에는 수백 개의 똑같은 책상이, 수백 명의 똑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카메라는 그 군중 사이를 천천히 헤엄치듯 지나가다 한 남자의 얼굴 앞에 멈춘다. 존 심스(제임스 머리). 그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다. 1928년, 킹 비더는 이 하나의 카메라 움직임으로 20세기 도시 문명의 냉혹한 진실을 선언했다.

1928년 킹 비더의 《The Crowd》. 도시 문명이 개인의 꿈을 어떻게 짓밟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의 비극은 악인이 없다는 것이다. 존 심스를 파괴하는 것은 폭력도 배신도 아니다. 그것은 도시 그 자체이며, 더 정확하게는 그 도시를 향해 그가 품은 환상이다.
1900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존 심스는 아버지로부터 "이 아이는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이 장면은 짧지만 결정적이다. 존의 비극은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부모의 기대가 주입한 '특별함'이라는 관념이, 이후 그의 모든 좌절의 근원이 된다.
성인이 된 존은 뉴욕으로 향한다. 그의 가방에는 야망이 들어 있다. 그의 눈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그는 보험회사의 말단 사무원으로 취직하지만, 그 직업을 잠시 머무는 정거장쯤으로 여긴다. 위대한 일은 곧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는 메리(엘리너 보드먼)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조용한 일상을 쌓아간다. 그러나 위대함은 끝내 오지 않는다. 비더는 이 무너짐을 서서히,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군중이 당시 관객에게 충격이었던 이유는 그 평범함 때문이었다. 할리우드는 1920년대 내내 팜 파탈, 갱스터, 귀족, 탐험가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올렸다. 보통 사람의 보통 삶(청구서 더미, 옹색한 아파트, 직장에서의 굴욕)을 정면으로 다룬 상업 영화는 없었다. 비더는 거기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리고 그 카메라 앞에서 존 심스의 꿈은 서서히 증발한다.
군중에서 카메라는 단순한 기록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체계 자체를 시각화하는 사회학적 도구이며, 동시에 그 체계 안에서 질식해가는 개인의 내면을 추적하는 심리적 도구이다.
영화의 가장 유명한 숏은 개봉 직후부터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사무실 침투 시퀀스다. 카메라는 뉴욕 거리에서 시작해 마천루 외벽을 타고 상승한다. 꼭대기 어딘가의 창문 앞에 멈추더니 유리를 통과해 실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실내에는 끝없이 펼쳐진 책상 위에 수백 명의 사무원들이 앉아 있다. 카메라는 그 줄을 따라 이동하다가 한 사람 앞에 멈춘다. 존 심스, 137번. 이 숏 하나가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한다. 당신은 군중 속 하나의 번호일 뿐이다.
1928년에 이 숏을 구현하기 위해 비더와 촬영감독 헨리 샤프가 동원한 기술은 당시에는 거의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실내 촬영 시 카메라 이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바퀴 달린 카메라 지지대를 사용했고, 창문 투과 효과를 위해 세트와 실제 촬영 장소를 정교하게 연결했다. 오늘날의 드론 숏이나 크레인 숏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이 장면을 보면 기술적 쾌감보다 그 의도의 날카로움이 먼저 감지된다.
비더는 뉴욕 도심을 로케이션으로 택했다. 코니 아일랜드의 놀이공원, 허드슨 강변, 맨해튼의 거리. 영화의 배경은 세트가 아니라 실제 도시다. 카메라가 인파 속을 누빌 때 주변의 행인들은 대부분 일반 뉴요커들이다. 이 선택이 영화에 다큐멘터리적 질감을 부여한다. 존과 메리가 코니 아일랜드에서 데이트하는 장면에서, 화면 안의 군중과 화면 밖의 관객 사이 경계가 모호해진다. 우리도 저 군중의 일부가 아닌가?
비더는 존과 메리의 관계를 도시의 소음과 침묵으로 측정한다. 이 영화에서 감정의 강도는 음악이나 대사 자막이 아닌 공간과 인파의 밀도로 표현된다.
결혼 초 두 사람의 신혼 아파트는 좁고 소음으로 가득하다. 이웃집 파티 소리, 거리의 차 소리, 공사 소음 — 비더는 이 모든 소음을 화면 안에 가득 채운다. 신혼의 낭만은 도시의 소란에 침식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소음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웃는다. 이 시퀀스에서 사운드(무성영화이지만 자막으로 소음의 존재를 전달한다)와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관계의 질감을 측정하는 도구다.
영화의 중간 지점에서 두 사람의 아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장면은 무성영화 시대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비더는 이 죽음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거리로 나가, 아이가 사고를 당하는 모퉁이 주변에서 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아이의 죽음과 세상의 무관심이 동시에 프레임 안에 공존한다. 비극은 언제나 군중 속에서 일어나고, 군중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간다.
존은 이 상실 이후 직장을 잃고, 자존심을 버리고 광고판을 들고 거리에 선다. 한때 위대해지리라 믿었던 남자가 샌드위치맨이 된다. 비더는 여기서 카메라를 멀리 물린다. 군중 속에서 광고판을 든 존은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 그 또한 군중의 일부가 된다. 카메라 거리와 인물의 존엄감이 반비례하는 이 연출은, 말 없이 존의 전락을 이야기한다.

제임스 머리는 군중 속 엑스트라로 발견되었고, 군중 속에서 사라졌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적 울림을 갖는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의 실제 삶이 영화의 주제와 기이하게 겹치기 때문이다.
비더는 존 심스 역할을 위해 수개월간 배우를 찾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영화적으로 특별해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얼굴, 군중 속에 섞이면 눈에 띄지 않을 얼굴을 원했다. 어느 날 오디션장에 온 수백 명의 엑스트라 중에서 비더는 제임스 머리를 발견했다. 사실 '발견'이라는 표현도 과장이다. 비더는 단지 군중 속에서 걸어나오는 한 남자를 눈여겨봤을 뿐이다.
머리는 이 영화 한 편으로 MGM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의 경력은 순탄치 않았다. 알코올 의존증이 그의 삶을 야금야금 잠식했고, 영화 출연 기회는 점점 줄었다. 1930년대 초, 그는 이미 할리우드에서 잊힌 이름이 되어 있었다. 1936년, 머리는 뉴욕 허드슨 강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향년 35세. 자살인지 사고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자신이 연기한 존 심스처럼, 그는 이름 없는 죽음으로 군중 속에 소멸했다.
엘리너 보드먼은 당시 현실에서도 비더의 삶과 얽혀 있었다. 두 사람은 영화 촬영과 거의 동시에 결혼했다. 영화 속 부부의 갈등과 현실 결혼의 시작이 겹치는 이 기묘한 구조가, 보드먼의 연기에 어떤 진짜 감정을 불어넣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무리한 추론이 아니다. 비더 자신도 이 영화를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작품으로 꼽았다.
군중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거의 관심을 두지 않던 영역을 개척했다. 그 영역의 이름은 '보통 사람의 진짜 삶'이었으며, 이 개척은 20년 후 이탈리아에서 꽃피우고, 또 다시 수십 년이 지나 미국으로 돌아온다.
1948년 이탈리아에서 비토리오 데 시카가 자전거 도둑을 만들었을 때, 영화사학자들은 즉시 비더의 유산을 언급했다. 로케이션 촬영, 비직업 배우 기용, 노동 계층의 일상을 드라마의 핵심으로 삼는 방식 — 두 영화는 20년의 간격을 두고 놀랍도록 유사한 방법론을 공유한다. 물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은 군중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이미 이 방향을 실험한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화사의 계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비더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영화는 독특하고 예술적인 작품 부문 후보로도 지명되었다. 그러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MGM의 루이스 B. 메이어는 이 영화의 암울한 결말을 우려해 여러 버전의 엔딩을 제작했다. 더 밝은 결말, 더 희망적인 결말. 비더는 그 요구에 저항하며 자신의 결말을 지켰다. 마지막 장면에서 존과 메리는 극장에서 웃으며 공연을 관람한다. 두 사람 주변의 관객들도 웃는다. 카메라는 서서히 물러나며 그들을 군중 속으로 녹인다. 행복한 척하는 것인가, 진짜 행복한 것인가. 비더는 답을 주지 않는다.
이 열린 결말의 전통은 이후 도시 드라마의 문법이 되었다.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 존 카사베테스의 인물 드라마, 시드니 루멧의 뉴욕 리얼리즘까지 — '도시 속 보통 사람'을 추적하는 카메라의 계보는 비더의 이 숏에서 출발한다.

100년 전, 비더가 포착한 도시인의 고독은 2026년의 서울과 뉴욕에서 더 정밀해진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좌절을 SNS에 중계하고, 평범함을 스스로 가장 큰 실패처럼 느끼는 시대 — 자신이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과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는 공포는 오히려 증폭되었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2019)에서 부부의 균열이 도시를 배경으로 천천히 가시화될 때, 혹은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들이 평범한 미국인의 실패와 표류를 조용히 관찰할 때 — 그 카메라의 눈은 비더의 눈에 닿아 있다. 보통 사람들(1980),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 같은 작품들이 미국 중산층의 내면 균열을 드라마로 번역할 수 있었던 것도, 비더가 먼저 그 언어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또한 무성영화 시대의 심리 드라마가 얼마나 정밀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자막 카드가 거의 없는 긴 시퀀스에서, 관객은 얼굴 표정과 공간 구성만으로 두 사람의 감정 변화를 읽는다. 그것은 일종의 순수한 영화적 경험이다. 언어 이전의 영화.
◆ 마천루 침투 숏 — 영화 초반, 카메라가 고층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 창문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주목하라. 1928년에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지 생각하면서 보면 감탄이 두 배가 된다.
◆ 책상 번호 137 — 존 심스의 책상에는 번호가 붙어 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는 존재. 이 작은 디테일이 영화 전체의 주제를 요약한다.
◆ 코니 아일랜드 시퀀스 — 존과 메리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하는 장면의 군중을 살펴보라. 그들은 배우가 아닌 실제 뉴요커들이다.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 소음의 자막 — 무성영화임에도 비더는 이웃집 소음, 거리 소리를 자막과 화면 구성으로 전달한다. '보이는 소리'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의식하며 보라.
◆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 이동 — 클로즈업에서 시작해 서서히 물러나며 두 사람을 군중 속으로 녹이는 마지막 숏.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는 속도가 이 영화의 모든 감정을 담고 있다.
◆ 해돋이 (1927) — F.W. 무르나우가 도시와 농촌의 대비로 부부 관계를 탐구한 작품. 비더와 무르나우는 1927~28년 할리우드에서 동시에 부부의 감정을 카메라로 포착하고 있었다. 두 영화를 나란히 보면, 무성영화 시대 심리 드라마의 정점이 보인다.
◆ 마지막 웃음 (1924) — F.W. 무르나우의 독일 무성 걸작. 고급 호텔의 제복 입은 도어맨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화장실 관리인으로 강등되며, 제복과 함께 사회적 존엄까지 잃어간다. 자막 카드를 거의 쓰지 않고 오직 카메라와 표정만으로 한 평범한 개인의 몰락을 그린다는 점에서,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존 심스의 이야기와 정확히 같은 주제를 공유한다.
◆ 시민 케인 (1941) — 오슨 웰스의 이 작품은 표면상 정반대처럼 보인다 — '위대함'을 획득한 사람의 이야기이므로. 그러나 케인이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도 결국 군중 속에서 잃어버린 한 가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영화는 같은 질문을 뒤집어 묻고 있다. 위대함과 보통함, 어느 쪽이 더 외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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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AI 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